'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닉슨처럼 지금이라도 사퇴할까. 아니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평소 즐겨 보던 드라마 '김과장'을 보는 둥 마는 둥 자리에 누웠다. 억울한 생각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선글라스를 낀 아버지가 나타났다. "걱정 말아라. 넌 잘못한 게 없다. 큰일을 하다 보면 자잘한 실수는 있게 마련이다. 사람을 잘 못 부린 게 큰 죄는 아니다. 그리고 말이다, 태극기가 널 지켜줄 거다." 설움이 북받쳐 아버지를 붙들고 한참을 하소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청와대 경내까지 몰려와 "당신은 탄핵당했으니 나가라"고 다그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꿈인지 생신지 경황이 없는데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그 순간만큼은 노무현이 너무 부러웠다'. 

10~20년쯤 후 박근혜 대통령의 회고록 한 페이지에는 그날 아침이 이렇게 적혀 있지 않을까.

그날이다. 박 대통령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다. 오전 11시 온 국민의 눈과 귀는 TV로 쏠릴 것이다. 헌재의 선택지는 세 개다. 인용, 기각, 각하. 헌법연구가들은 각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인용하든지 기각하든지 두 갈래 길이다. 헌재의 정족수는 원래 9명이다. 현재는 박한철 전임 소장의 퇴임으로 1명 빠진 8명이다. 탄핵이 인용되려면 6명이 찬성해야 한다. 반대로 3명 이상 기각 의견을 내면 탄핵안은 폐기된다. 재판관들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겠지만 여론조사를 보면 민심은 70% 이상이 탄핵 인용을 원하고 있다. 탄핵 찬성 쪽은 헌재도 민심을 외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반대쪽에 선 사람들은 민심은 민심이고, 법률적인 판단은 다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어느 쪽으로 결론 나든 8 대 0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2005년 개정된 헌재법에 따라 소수의견도 결정문에 표시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탄핵 같은 중대한 결정에서 소수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소수의견이 불복의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도 재판관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어쨌거나 헌재의 선고가 내려지면 그에 맞춰 정치 일정이 진행되겠지만,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건 선고 이후다. 인용이든 기각이든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진 찬반 양측이 쉽사리 승복할 것 같지가 않다는 거다. 불확실성이 걷히기는커녕 더 큰 혼돈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탄핵 반대 측은 8일 오전부터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헌재 인근에서 노숙 집회에 들어갔다. 탄기국(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행주치마의병대, 엄마부대, 대사모(대통령님을 사랑하는 모임) 등의 이름 아래 모인 이들은 '정의와 진실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노숙을 하자'며 결의를 다졌다. 가스통과 솥단지까지 집회장소에 반입하려다 경찰에 저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만약 탄핵이 인용된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불복종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이다.

촛불에 비하면 소수이지만 이들이 무서운 것은 과격함이다. 대부분 어르신이라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게 폭행당했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린다. 박영수 특검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박영수 죽여라' '몽둥이맛을 봐야 한다'거나 심지어 '모가지를 따 버려라' 등의 섬뜩한 구호를 외치며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이다. 아파트 앞에 실제로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법원이 박 특검 자택 100m 이내 집회금지 처분을 내렸겠는가. 헌법재판관들도 출퇴근 때 경호가 필수가 됐다.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측도 매일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잇따라 시국선언을 통해 탄핵 인용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탄핵이 기각되면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기각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다.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집회를 막을 수는 없다. 탄핵 선고 결과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는 것 또한 자유다. 하지만 그게 정도를 넘어 법치를 위협한다면 이는 용인될 수 없다. 법절차에 따라 내려진 결론을 수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말인즉슨 그렇다는 게다. 다수가 원하는 결론과는 다른 선고가 내려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많은 국민이 집단 우울증에 빠질 거다. 어떤 이는 성난 민심이 민란으로 이어질 거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어려운 숙제가 던져졌다. 국민통합에 힘을 모아야 한다. 국민의 등에 업혀서 여기까지 온 정치인들은 이제라도 존재의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석 달간 온 나라를 뒤흔든 혼돈에서 질서 있게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야 한다. 사드에, 북한 미사일에, 한일갈등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금. 사람 하나 잘못 선택한 대가치고는 대한민국의 고통이 너무 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걸음씩 물러나자.

편집국 부국장 dol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