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 주요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 비문(비문재인) 세력 중심의 '개헌 연대'니, '개헌 대 반개헌 프레임'이니, '개헌시 대통령 임기단축'이니 말들이 많다. 개헌이 대선의 핵심 변수로 꼽히는 이유다. 견원지간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도 조기 개헌에는 손을 맞잡았다. 두 정당은 '대선 전 개헌'에 합의했고, 국민의당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개헌의 정파 간 함수관계가 읽히는 모습이다.

알다시피 개헌은 시대적 요구이자 과제다. 그 추진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가 말해주듯 제왕적 대통령과 권력 독점의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게 개헌의 국민적 공감대다. 신년 여론조사 결과, 국민 65%가 개헌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체제로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건 이제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요즈음 중앙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은 선거공학적 전략에 함몰된 듯하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내세우지만 4년 중임제, 6년 단임제, 이원정부제 같은 권력구조 개편에 신경을 쏟고 있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에서 '개헌이 되면 이번 대선은 우리가 반쯤 이긴다'는 말이 터져나온 건 개헌 추진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준다. 지방분권 개헌은 안중에 없는 거 같다. 정치권이 지방분권 의지가 있다면 지방일괄이양법부터 제정, 시행하는 게 온당하다. 이 법은 2000~2012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이 결정되고도 완료되지 않은 사무들을 일시에 넘겨줘 지방분권을 촉진하자는 내용이다. 아직 지방에 넘어가지 못한 일괄이양대상 사무는 600건이 넘는다.

그동안 개헌 논의는 대통령 탄핵 국면과 '선 대선, 후 개헌론'에 밀려 침체한 상태였다. 그러다 헌재 결정에 따라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자 개헌 기류도 빨라졌다. 민주당을 제외한 여야 3당이 개헌 연대를 형성하는 것도 대선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지지율에서 민주당 주자들에게 뒤처진 상황을 개헌 카드로 뒤집어보자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선두 주자로 대세론을 구가하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개헌에 대한 입장을 질질 끄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 노림수와 복선으로 비친다.

이처럼 개헌 논의가 대선 득실의 틀에 갇혀있는 건 국민을 무시하는 행태다. 대선 전 개헌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바른정당 대선주자 유승민 의원의 자세가 차라리 솔직하다. 권력구조만 바꾸는 '원포인트 개헌'을 대선 전에 하는 건 민심과 괴리가 있다는 비판이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개헌을 시간에 쫓기듯 추진하는 건 잘못된 것이고 국민적 지지를 받기도 힘들 터이다.

우리나라 개헌사는 파란만장하다. 1952년 '발췌 개헌'부터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체제 개헌, 신군부 개헌, 6월 민주항쟁 개헌 등에 이르기까지 9차례 이뤄졌다. 주로 1인 장기집권과 군부 쿠데타,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개헌 과정에서 국민 참여는 별로 없었다.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든가 정치인들끼리 밀실 협상 또는 타협한 것을 국민투표로 찬반을 선택하라고 강요해왔다.

사실 개헌은 이상적인 생각만 갖고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정치권에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라고 하는 건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개헌은 나라의 기본 운영체계를 바꾸는 것이고 미래 세대까지 규제하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정략적 접근과 권력 나눠먹기식이 아니라 국민들의 삶과 기본권을 최우선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이를 위해선 상당한 선행 연구와 폭넓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근래 주목받는 '헌법의 상상력'의 저자 심용환 역사연구가는 '헌법은 권력자의 것인가, 국민의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다. "대통령제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는 건 의미없는 논쟁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헌 논의는 기본권과 각종 사회적 권리를 신장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치인들의 정략적 개헌 논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의 헌법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진정한 개헌을 하려면 그 논의의 틀을 제대로 만드는 게 순리다. 실무적으로는 국회 개헌특위에서 진행하겠지만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지방분권자치를 위한 실질적인 내용이 개헌안 의제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개헌은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가 필수 요소다. 그러기 위해선 추진과정 자체와 논의가 민주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결과 못지 않게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개헌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과거처럼 개헌이 일방적으로 이뤄지거나 정파 간 협상의 결과물 또는 정쟁의 산물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중앙집권체제가 유지되는 것에 그친다면 우리나라와 지방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편집국 선임기자겸 ㈔걷고싶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