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았던 조그마한 소도시에서는 시외버스 정류장을 '차부'라 불렀다. 배차간격이 길었던 까닭에 버스 한 대가 도착하면 먼저 타려는 사람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가끔 생겼다. 보통의 경우 조용히 해결됐지만 어떤 때는 서로 간 감정이 격해지는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차부에는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이들 몇몇이 나타나 단번에 혼란을 수습했다. 정류장 측이 승강장 내 질서 유지를 위해 고용한 사람들로 기억된다.
참 훌륭한 일을 함에도 이들은 승객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아마도 질서 유지원들이 저지른 '갑질' 때문이었을 터다. 어떤 승객이 이들과 평소 친분관계가 있었다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다. 좋은 좌석도 배정됐다. 다 팔렸다던 승차표도 이 사람들만 통하면 신기하게도 다시 나타났다. 항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어른들 대부분은 숨을 죽였다. 이른바 '완장을 찬 사람들'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다.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이 차부에서의 권력은 거론하기도 창피한 수준이다. 소도시에서 아무리 갑질을 한들 뭘 얼마나 했겠는가. 하지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국가가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다면 그때는 아무도 이를 막지 못한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중앙 권력이 아주 강한 국가다.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정치와 외교는 물론 교육과 문화 등의 분야에까지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3만 개 가량의 관직에 대한 임명권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 전체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앙정부의 힘도 막강하다. 지난 1995년부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있건만 지방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웬만한 사무 권한은 중앙정부에 있으며 재정까지도 사실상 독식한다.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은 8 대 2다. 각 지자체가 지방세 비율이 최소 40%가 돼야 지방재정이 강화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쇠귀에 경읽기다. 지방 정부로서는 무슨 사업을 하더라도 위쪽만 쳐다봐야 하는 형편이다. 오죽했으면 서병수 부산시장이 "부산은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조차 제대로 추진하기 힘든 무늬만 지자체"라는 말을 했겠는가. 사정은 다른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체제가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된 데는 헌법 때문이다. 현행 헌법에서 지방자치제를 규정하고 있는 조항은 제117조와 제118조 두 개밖에 없다. 그나마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와 같은 원론적인 내용만 담고 있어 진정한 지방자치제 정착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규정한 1987년 헌법이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지방분권형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됐다.
문제는 지방분권형 개헌의 필요성이 제기됨에도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대선주자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갖고 있는 분권과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분권의 개념이 달라서다. 정치권이 말하는 분권은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나 국회에 대거 넘겨주는 권력구조의 개편이다. 반면 지역사회는 대통령이나 중앙 정부의 권한이 지방 정부로 대폭 이양되는 분권을 갈망하고 있다. 이 둘의 간격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꼬집어 말한다면 중앙 정치권은 지자체의 이익에 조그마한 관심도 없다. 어떤 개헌이 유리할까만을 생각할 뿐이다. 집권에 방해가 되면 지역민과의 약속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이러니 지방분권형 개헌은 수십년이 지나도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지자체가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아서는 안될 일이다. 지방분권형 개헌을 요구할 시점으로는 지금만한 때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드러내 보인 무능 탓에 제왕적 대통령제 헌법을 손보자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다. 따라서 부산시를 비롯한 지자체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부산 등 8개 광역자치단체가 최근 지방분권형 개헌을 촉구하는 공동 결의문을 발표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또 서울과 부산 등 12개 광역지자체와 13개 기초단체가 결성한 전국지방분권협의회 발족 등도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부산시가 지방분권 개헌의 실천적 과제로 '부산해양특별시 설립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시의적절하다. 포괄적인 지방분권과 달리 부산에 초점을 맞춘 특화된 분권전략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방분권의 길은 멀다. 중앙 정부가 먼저 나서서 자신들의 권한과 권력을 떼어줄 리 만무하다.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뤄지는 것도 없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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