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강하면 부러진다'라는 말이 약한 자의 변명으로 들리던 20대 청년 시절. '어당팔' 즉 '어수룩한 사람이 당수 8단'이란 말을 처음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수룩해도 숨은 실력이 있다는 이 말이 왠지 실력 없고 소심함을 위장하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온실 같은 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어당팔이 내공 있음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세상의 매운맛을 톡톡히 봐야 했던 30대 중반 무렵 어당팔이란 말이 가슴에 훅 들어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어른들의 가르침과 오버랩되면서. 그 당시 집착했던 고사성어가 삼국지 속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의미다. 약자에게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으라고 조언을 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래 어둠 속에서 힘을 길러야지. '유비'가 '조조'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남으려고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처럼."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살아남는데 급급한 샐러리맨의 모습을 도광양회란 그럴듯한 포장 속에 감추고 싶었던 의도도 깔려있었던 것 같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었다.
세계 금융위기로 또 한 번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마흔 중반에는 어당팔을 최고의 처세 전략으로 여겼다. 이마에 늘어난 주름살처럼 세파에 제법 찌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노회함도 담겨 있는.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한 "자기 칼은 칼집에 숨겨놓아야 한다"라며 자기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어느덧 '하늘이 맡긴 사명을 깨닫게 된다'는 지천명을 넘어선 이제 와서 어당팔이란 말이 무섭게 다가왔다. 아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 상대는 긴장을 풀고 의도를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뭐하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하기도 어려운데.
좀 느닷없이 어당팔이란 말에 집착하는 것은 최근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배 전략을 본 영향 때문이다. "먼저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적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독일-유대계 혈통인 이 가문이 세계 금융계를 제패하는 밑거름이 된 전략답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화제가 됐던 책 '화폐전쟁'의 번역을 감수했던 박한진 코트라 중국사업단장은 마치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패(百戰不敗)'와 도광양회를 섞어 놓은 듯하다고 평했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되, 실력을 기를 때까지는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기다린다는 해석이다.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기도 힘든데, 참고 기다리기까지 하라니.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실천해 보려는 엄두조차 내는 것이 주저된다.
추산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대략 50조 달러(약 5경 원), 1경이 1만 조라고 하니, 우리 같은 서민은 머리를 싸매고 계산해 봐도 어림짐작도 못하는 단위다. 미국의 1년 국내총생산(GDP)은 18조1247억 달러. 세계 최고 경제대국인 미국의 3년 GDP를 1개 가문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세계 최고 부자로 알려져 있는 빌 게이츠 재산의 1000배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재산 규모뿐만 아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 가운데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지를 받은 후보는 대부분 당선된다는 주장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이 있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를 뒷받침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그룹 로스차일드에서 25년간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투자 업무를 맡았던 윌버 로스를 상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빌 게이츠는 알아도 로스차일드는 잘 모른다. 숨은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는 이 가문의 전략에 두려움조차 느낀다. 금융 재벌의 도덕성 문제는 일단 제쳐놓고.
그렇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드러낸 것은 달랐다. 일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전략이 있었다. 미국 정가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는 '월가'가 지배하는 주류 사회에 대한 반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트럼프는 선거 때 "월가와 싸우겠다. 월가 인사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사회는 최상위 0.1%와 하위 90%의 자산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양극화가 극심하다. 이에 대한 미국식 저항이 트럼프 지지로 이어지는 이면에 '월가' 최고 부자의 숨은 손길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를 알아내는 문제였다.
우리도 올 상반기 대선이 유력해지면서 대권 레이스가 뜨겁다. 대권 주자들이 만드는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이 실제로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를 간파해야 하는데. 참 어려운 일이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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