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트럼보'는 194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있었던 블랙리스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좌익 성향으로 의심되는 43명의 영화인이 미 의회 '반국가행위 조사위원회'(HUAC) 청문회에 출두해 증언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이들 중 10명은 미 수정헌법 제1조 언론 출판의 자유를 내세우며 출석을 거부한다. 그 결과 소위 '할리우드 텐'으로 불리던 이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1년간 투옥되고, 이후 일자리까지 잃게 된다. 영화는 그중 한 명인 작가 '돌턴 트럼보'(1905~1976)가 시대의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낸다. 생계를 위해 그가 차명으로 쓴 '로마의 휴일'이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 아이러니도 보여준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이어졌다. 1950년 2월 공화당 상원의원 J. R. 매카시는 "미 국무성 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하였다. 근거가 불충분한 205명의 블랙리스트는 이후 정치계는 물론 학계, 문화예술계로까지 큰 파문을 몰고 왔다. 당시 악명 높았던 FBI 국장 에드가 후버 역시 매카시즘을 증폭시키는 한 축이었다. 영국 출신의 코미디 황제 찰리 채플린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지만, 그는 끝내 의회 조사위원회 출석을 거부하였다. 결국 1952년 '라임라이트' 영국 개봉을 위해 미국을 떠났던 채플린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후버가 채플린의 재입국을 막은 것이다.
블랙리스트와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사상 검증 광풍의 이면에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미국 사회의 두려움, 즉 적색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미·소 냉전체제 및 중국 공산화 등으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이 뚜렷해졌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블랙리스트와 매카시즘 광풍은 진정되었다. 매카시즘의 시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이성적인 시대였다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블랙리스트는 군사정권 시절의 전유물이었다. 군사 독재에 저항하고 노동현장에서 싸우는 민주인사의 이름은 항상 블랙리스트라는 형식으로 군사정권에 내재화했다. 이 시기의 블랙리스트는 체포와 강압적 고문 수사가 뒤따르는 공포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검열 역시 문화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철저히 군사정권의 지침에 맞게 재단하려는 폭압적 규율이었다.
이제 또다시 블랙리스트라는 검은 그림자가 우리 문화예술계를 뒤덮고 있다. 군사정권 이후 서서히 약화되었던 검열과 편 가르기가 21세기 현 정부 들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화되었음을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했다고 해서, 또한 특정 사건에 대한 시국선언 등에 참여했다고 해서 9400여 명의 문화예술계 인사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또 그동안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해 온 사실 역시 밝혀졌다.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직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 또한 속속 밝혀져 그 충격은 더하다.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창조경제'를 내세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창조경제를 구현하는 큰 축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이지만, 그 기술을 있게 만드는 바탕에는 개인의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상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적인 토대 못지않게 인문·문화예술적인 토대 역시 중요하다. 한 사회의 문화예술적인 방향성을 사상성이라는 기준에만 맞추려는 현 정부의 정책은 문화의 등을 찌르는 야만적인 행위이다.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생성은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창조경제를 표방하며 문화 진흥에 힘쓰겠다던 현 정부가 돌연 과거 공안정국의 중심인물을 최측근에 앉혔다는 사실은 이미 유신정권의 시스템으로 회귀하고 싶은 희망사항을 여실히 내보인 것이다.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현 정부가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심각한 범죄는 단연 블랙리스트 작성이다. 예술가들, 더 나아가 국민의 생각과 사상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욕망이야말로 지금까지 밝혀진 비선 실세, 직권남용 등의 잘못보다 훨씬 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 속성은 자유와 창조이다.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양한 틀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이 만들어 낸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한 채 그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특정 이슈에 참가한 사실만으로 사상검증을 하려 한 발상 자체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다. 블랙리스트라는 형식으로 자행되는 교묘한 편 가르기와 편파적인 지원체제는 공정경쟁을 해쳐 이제 정착단계에 접어든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다시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관제예술이라는 볼썽사나운 기형아의 생산은 덤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실패했다.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편협한 잣대로 섣불리 재단하려는 오만함, 그것이 현 정권의 민낯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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