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하 수상하다. 한 해의 소망을 빈다는 정월 대보름날 서울 광화문과 대한문에서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맞붙었다. 살벌한 구호들이 난무하고 상대방을 향해 살기 가득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 갈등을 풀어야 할 여야 정당들도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우리나라는 더 큰 갈등과 대립, 분열과 증오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정치권에서는 설 이전부터 '탄핵기각설'이 무슨 음모론 비슷하게 나돌았다. 지난달 말 박한철 헌재소장이 퇴임하면서 헌재 재판관은 8명으로 줄어들었다. 다음 달 13일 퇴임예정인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 이후까지 탄핵심리를 끌고 가면 헌재에는 7명의 재판관만 남는다. 대통령의 탄핵을 위해서는 6명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2명만 탄핵에 반대하면 탄핵은 기각된다. 확률적으로는 박 대통령에게 확실히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그동안 야당은 박 대통령이 파면되고 4월 말이나 5월 초에 대선이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민주당은 경선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유력한 후보인 문재인 전 대표, 안희정 지사, 이재명 시장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각종 공약과 비전을 제시해왔다. 국민의당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안철수 의원도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하고 있고,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은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하면서 '스몰텐트'의 첫 단추를 끼웠다. 그러는 사이 이른바 '박근혜 대통령 옹위 세력'에게 반격의 틈을 주었다.

박 대통령 측은 지난해 12월 9일 탄핵소추가 결정된 후 집요하게 지구전을 준비해 온 것 같다. 새해 첫날 박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간담회를 했다. 일체의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결정적 변곡점은 1월 19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다. 특검의 추동력은 확연히 떨어졌다. 박 대통령 측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1월 25일 박 대통령은 인터넷방송(정규재TV)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지지층에게 호소했다. 자신은 (정치적 음모에) 엮인 것이고, 태극기집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의로운 행동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조기 대선을 기정사실화하고 대선준비에 몰두했던 야 3당은 8일 긴급 대표회담을 했다. 대선준비를 조금 늦추고 탄핵에 역량을 결집하기로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문재인 전 대표는 다시 촛불을 높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 측의 대응도 결사적이다. 9일 정기승 전 대법관 등 원로 법조인 9명 공동명의로 신문광고까지 게재했다. 이들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호오(好惡)나 찬반(贊反)을 떠나 법률전문가로서 의견을 개진한다며 탄핵소추과정이 비정상적 졸속으로 처리되었다고 지적한다.

지난 목요일 헌재는 16차 심리 다음 날인 23일까지 청구인과 피청구인 모두 그동안의 입장을 정리해서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했다.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전인 3월 초에 결정을 내릴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물론 변수는 있다. 박 대통령이 최후변론에 나서거나 박 대통령 측 변호인들이 전원 사퇴하여 시간을 끌 수 있다. 물론 지금 헌재의 흐름으로 봐서는 그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탄핵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왜 그리 서두느냐고 절차적 정당성을 두고 시비를 걸 여지가 충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탄핵만이 길이었을까. 필자는 이른바 최순실 국정 농단 게이트가 발생한 이후 일관되게 박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해왔다. 물론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15일 문재인 전 대표도 박 대통령의 선(先) 퇴진선언과 후(後) 퇴진방안 논의를 제안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새누리당의 '4월 말 퇴진-6월 말 조기 대선' 당론을 수용한 바 있다. 그런데 정치권이 명분과 아집에 매달려 결국 탄핵의 과정을 밟으면서 우리 사회가 그야말로 두 동강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이토록 극단적으로 나뉜 나라를 그것도 여소야대의 정당 구조 속에서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정권 인수인계 과정도 없이 바로 국정을 추슬러 가야 하는데 내각인들 제대로 꾸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혼자 상상해본다. 만약에 정치권이 지혜를 모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취하하고, 대통령은 조기하야를 선언한다면. 물론 박 대통령 퇴임 이후 사법처리까지를 면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통 큰 대타협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