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듣자면 최후의 심판이란 종교적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사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기계가 인간을 절멸시키는 계기가 된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는 로봇으로 가상한 근육질 배우의 볼거리 액션이 끌고 가지만 '만약 이런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이란 나중 생각에 오싹해진다.
사반세기 전에는 영화의 상상력에나 가능하던 일이 하나둘 실현되고 있다. 기계음 요란한 모뎀을 통해 텍스트를 주고받던 피시통신이 스마트폰으로까지 탈바꿈했고 기계의 하나로 공장에 갇혀 있던 로봇이 생활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피시가 보급되던 시절처럼 말이다.
하지만 심판의 날을 다시 떠올린 것이 스마트폰이나 강아지 로봇 때문은 아니었다. 요즘 조기 대선을 가상한 정국에 두루 회자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은 빌려온 개념이다. 어디서 빌렸을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제4차란 말이 나오려면 당연히 그에 앞선 몇 차례의 산업혁명이 전제되어야겠다. 가까이서 찾아보니 제4차라는 것도 제레미 리프킨이 내놓은 제3차 산업혁명 개념에서 착안했을 공산이 커 보였다.
그때는 밀레니엄, 세기말이어서 그런 제목들이 유행했는지 모르겠다. 종결자라는 제목의 영화가 나오고 몇 년 뒤 '노동의 종말'이란 책이 나온 것도 공교롭다. 리프킨은 세기말 거기서 제3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지금 세계 시장과 생산 자동화라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노동자가 거의 없는 경제로 향한 길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이 길이 우리를 안전한 천국으로 인도할지, 무서운 지옥으로 인도할지 여부는 제3차 산업혁명에 뒤따를 후기 시장 시대를 문명이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노동의 종말은 문명에 사형 선고를 내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고 인간 정신이 재탄생할 예조일 수도 있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문명, 무거운 말이다. 사실 리프킨이 주창한 제3차 산업혁명은 요즘 회자되는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맥락의 개념이다.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론과 외양이 다르지만 제4차 산업혁명 개념도 '자동화'에 초점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동화가 좋기만 할까?
현재 문명의 체제에서 자동화가 극에 달한다면 임금노동의 종말로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어쩌면 심판의 날 같은 대혼란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리프킨이 말한 무서운 지옥, 사형 선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문명의 전환, 인간 정신의 재탄생을 시사했던 리프킨은 2012년 총괄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공유'였다.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등 종말 시리즈에서 이미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공유를 공언할 경우 자칫 오해와 비난을 사기 쉬워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결국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만일 모든 도구가 우리의 명령을 받거나 우리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제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이달로스가 제작했다는 입상들이나 또는 '저절로 신들의 회의장으로 갔다'고 시인이 말하는 헤파이토스의 세 발 솥들처럼 베틀의 북이 저절로 움직이고 채가 저절로 키타리스를 뜯는다면, 장인에게는 조수가 필요 없고 주인에게는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자동 기계를 언급하는 사람은 저 옛날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신화를 끌어들인다. 인간의 역사가 자동에서 자율로 넘어왔다는 그리스 신화를 믿었던 탓이리라. 태초에 신은 인간을 먹여 살려 주었지만 나중에 인간을 멀리하게 되었고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된 인간에게 기술이 주어졌다는 신화 말이다.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구는 크게 생산을 위한 도구와 활동을 위한 도구 두 가지이다. 베틀이나 조수가 생산을 위한 도구의 예이고 키타리스나 노예가 활동을 위한 도구이겠다. 생명을 가진 사람인 조수나 노예도 도구라니! 사실 어느 회장님의 유명한 머슴론과도 상통하는 생각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구축한 헤겔과 한 발 더 나아간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공유라는 리프킨의 전망과 진단도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지 싶다. 이제 노동의 종말을 넘어 심판의 날을 피하고 안전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묻자. 공유는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 되었든 '식탁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되었든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 지금처럼 좁은 시야에 갇혀 남의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짓은 그만두고 배우고 상상하자. 그러다 보면 오래된 미래에서 지혜를 빌릴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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