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야구의 메카' 구덕야구장이 다음 달부터 철거된다고 한다. 체육공원으로 새 단장을 하지만 구덕야구장에 얽힌 이런저런 추억 보따리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필자에게도 구덕야구장 추억은 남다르다. 1967년 경남중 2학년 때부터 구덕야구장 출입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어언 50년이다. 매년 여름방학인 7월 말께 그곳에서 일주일간 열리던 화랑기 고교야구대회(당시 국제신문 주최, 이하 화랑기대회)를 중2 때부터 고2 때까지 4년간 거의 전 경기를 보며 '야구 갈증'을 달랬다. 지역 예선을 거친 전국 고교 강호들의 열전은 야구 관람 수준을 크게 높여 평생 야구와 연을 맺게 해줬다.

대학 졸업 후 언론사에 입사, 23년간 기자 생활하면서 주로 야구 전문기자로 활동한 것은 구덕야구장 덕분이다. 야구 전문서적을 두 권이나 펴냈고 kt 스포츠 전무이사로 프로야구 10구단인 kt 위즈의 창단을 지원한 것도 구덕야구장에서의 열렬한 관전이 아니었음은 불가능했으리라.

2011년 고교야구 주말리그의 시행으로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지만, 화랑기대회는 숱한 명승부를 연출했다. 그중 하나가 1968년 경남상고(현 부경고) 2년생 좌완 이종구의 완봉 역투다. 1968년 당시 부산에는 경남고-부산고, 경남상고-부산상고(현 개성고) 등 네 개의 고교야구팀이 있었다. 서울의 중앙대회 출전 티켓은 두 장뿐이었는데, 경남상고와 부산상고는 예선에서 경남-부산고의 위세에 밀려 본선 무대를 거의 밟지 못했다.

하지만 화랑기대회는 부산 네 팀에게 자동 출전의 혜택이 주어져 경남상고-부산상고의 선수들은 '거의 유일한 전국 무대'인 화랑기 대회에서 스타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경기에 임했다. 경남상고는 8강에서 경북고와 마주쳤는데, 초고교급 강속구의 좌완 임신근(1949~1991)이 이끄는 경북고는 3월 시즌 개막 후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천하무적 팀이어서 경기 전 예상은 경북고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경남상고는 이종구가 완봉투에 이어 결승타를 날리는 '원맨쇼'에 힘입어 경북고를 1 대 0으로 완파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알려진 야구 명장 김동엽(1938~1997)의 심판 데뷔다. 김동엽은 1968년 조흥은행 야구팀이 해체되자 1971년 건국대 감독으로 가기 전 2년간 아마야구 심판으로 활동했는데 1969년 화랑기대회 때는 초보 심판이었지만 인기를 끌었다. 1루심을 볼 때 타자 주자가 아웃되면 양팔을 옆으로 제치는 요란한 제스처에 "유~아~라~웃(You're out)"이라고 운동장이 떠나갈 정도로 함성을 지르면 관중들은 재미있다고 박장대소했다.

구덕야구장은 단순히 야구 경기를 보는 장소가 아니었다. 구덕야구장 근처에 살거나 초중고를 다니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야구장에서의 불꽃 튀는 승부, 투수-타자 간의 치열한 경쟁, 패배한 자의 절치부심, 한 가지 일에 대한 집중-몰입을 통해 훌륭한 야구인과 사회의 지도자가 됐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낸 '야구 영웅' 최동원(1958~2011), 한국-미국-일본 프로야구를 동시에 해설할 수 있는 '국민 야구해설가' 허구연은 어린 시절부터 구덕야구장에서 꿈을 먹고 자랐다. 대동중 시절 공부를 팽개치고 구덕야구장 개구멍을 드나들었던 박인국(전 UN 대사)은 뛰어난 외교관으로 성장했고, 야구장에서 응원 함성을 지르던 문재인(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은 대선 후보로, 서병수(부산광역시장)는 정치-행정가로, 김정태(하나금융그룹 회장)는 금융인으로 대성했다.

구덕야구장을 철거하면서 부산시는 상업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일단 체육공원을 만든 뒤 전체 개발 방향은 미래 세대를 위해 비워 두겠다"고 천명했다. 혹 구덕야구장이 국제적 메가스포츠를 유치할 수 있는 초대형 스포츠 콤플렉스로 거듭난다면 미래 역군의 산실로 탄생하지 않을까. 30~40년 전 '구덕야구장 키즈'들이 대한민국의 각계 인재로 성장했듯이.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쿠르트 뷔트리히 스위스 연방기술원 교수는 "세상을 보는 눈을 폭넓게 키우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아시아를 뛰어넘는 부산시의 중장기 프로젝트가 가동되어야 할 시점이다.

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