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10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모철민(59·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주프랑스 대사는 예상 못 한 진술을 했다. 박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전 체육국장과 진재수 전 체육정책과장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나쁜 사람이라 그러더라'고 말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모 전 수석은 박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증인으로 요청한 인물이다.

그는 노 전 국장과 진 전 과장이 작성한 승마협회 보고서에 대해서도 "당시 보고서가 잘 돼 있다고 생각했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동안 청와대는 이 두 사람을 인사 조치한 것은 승마협회 보고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맡았던 모 전 수석이 보고서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청와대가 문체부 인사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정황이 명백해졌다.

'청와대 게이트'의 진상 규명이 진행될수록 박 대통령을 향한 올무는 점점 더 조여지고 있다. 그런데, 한 여권 관계자는 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박 대통령에 불리한 증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이 정부에는 장세동 같은 사람이 없다"며 개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몇 달간 국정이 마비된 현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대통령에게 직언한 참모들이 없었다는 점부터 한탄해야 하지 않나.

'왕수석'이라고 불리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은 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지시하는데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직언은커녕 박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 안 전 수석은 얼마 전 "검찰 수사 초기에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묵비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역사 앞에 선 것인 만큼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설득을 받아들여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만큼 특검 수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늦었지만 한때 대통령의 참모로서, 공직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담당한 공무원들이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도록 강요한 쪽도 청와대였다. 공무원은 말 그대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복'이다. 그럼에도 윗선의 지시대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최 씨의 국정 농단이 진행되도록 공무원들이 협조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고착화된 것은 박 대통령의 제왕적 리더십 탓임이 분명하다.

헌재의 탄핵시계는 탄핵심판 선고일을 향해 바삐 달려가고 있지만, 박 대통령의 대리인단은 무더기로 증인을 추가 신청하는 등 탄핵심판을 지연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경찰도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던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을 증인으로 출석시키겠다고 자신하는 것을 봐서는 탄핵심판을 장기화시키면서 장외 여론전까지 가미해 탄핵 기각도 기대하는 듯하다. 박 대통령이 직접 헌재에 출석하는 것까지도 고려한다고 한다.

북핵 위협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로 말미암은 중국과의 마찰 등 현 상황은 박 대통령이 직무정지가 되기 전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내외적 위기'보다 더욱 심각하다. 국정이 수개월째 마비된 현 상황이 조속히 정리되는 것만이 국정 안정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위 공직자인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질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다.

서울정치부 부장 tg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