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진행 중인 개헌 논의가 아찔하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30년 지난 '87년 체제'에 대한 수정요구가 분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먼저 꼽힌다. 이 헌법으로 국정을 맡았던 모든 대통령의 마지막이 불행했다는 점에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고 광범위하게 변화했다는 점이다. 정보통신의 비약적 발전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정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와 요구를 담아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대선주자들과 정당, 정파들이 꺼내 든 개헌론을 탓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개헌론이 지극히 정파적 이해에 따라 제기된다는 데 있다. 심지어 자신이나 자기 정파에 유리한 개헌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여론을 왜곡하려는 시도까지 한다.

개헌에 목을 매는 정치인과 정파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제왕적 대통령만 사라지면 후진적 정치구조가 금방이라도 극복될 수 있을 것처럼 감언이설을 쏟아낸다.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로 개헌하자는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말로 포장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고, 비선실세의 추악한 국정 농단을 막지 못하고 정치불신을 넘어서 정치혐오증을 만든 정치세력들이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하자고 한다. 그들은 제왕적 대통령이 우리 정치를 세계의 조롱거리로 만들었다고 우긴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개헌하면 한국정치가 삼류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국민은 비선실세의 분탕질에 놀아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동시에 국민은 이런 국정농단에 동조하거나 묵인한 집단에 대해 불신과 혐오를 가지고 있다. 여의도 정치가 그 대상이다.

더 따져보자.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가 분권형 대통령제인가. 의원내각제는 특권과 무능, 부패로 얼룩진 국회가 행정부까지 좌우하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제도를 내각책임제라며 책임정치 운운하는 말장난하는 것도 비겁하다.

대통령과 총리가 외치와 내치를 나눠 맡는 이원집정부제는 더 기가 막힌 발상이다. 국회 개헌특위에서도 지적된 내용이지만, 이미 세계화된 현실에서 외치와 내치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대통령과 총리가 국정영역을 놓고 대립하면 국정혼란은 불가피하다.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는 모두 국회의원의 권한을 행정부까지 확대하는 것이 본질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제왕적 국회로 대체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좋은 개헌은 주권재민과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집단이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분점할 때 가능하다. 개헌의 주요 목표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국민의 뜻에 따른 국정은 견제와 균형이 달성될 때 가능하다. 복잡다단한 대내외적 환경에서 대통령 1인, 중앙정부 1극의 대응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분권형 대통령제이다.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만큼 국회 독재를 막을 수 있도록 양원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유권자 수를 기준으로 뽑는 의원으로 구성하는 현행 단원제 국회는 이미 수도권 국회이다.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 의원까지 합치면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수도권 이익을 대변한다. 지역대표형 상원을 구성함으로써 국가정책이 지역균형발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정·부통령제를 통해 행정권력 내부에서 실질적인 '내부견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통령은 단순히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자가 아니다. 현 정부의 미래권력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의 '일탈'을 제어하는 기능도 있다. 정·부통령제는 지역주의를 완화하는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정치권력집단이 그가 속한 집단의 권한을 내놓는다고 하면, 좋은 개헌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자기와 집단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한다면, 그건 나쁜 개헌이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대선 이전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더욱 나쁜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

서울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