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며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1946년 작 '멋진 인생'이다. 모퉁이극장에서는 최근에 한 고등학교 인문학수업의 일환으로 영화토론모임을 열었는데 그때 함께 본 작품이 바로 이 영화다. 70년 전에 만들어졌고 2시간이 넘는 흑백영화였는데도 학생들은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즐겁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협소한 공간과 긴 러닝타임에 불편하지는 않을지 걱정한 것은 기우였다.

영화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멋진 인생'은 조지 베일리라는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조지는 대학에서 건축도 공부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싶은 꿈 많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느라 꿈을 접고 고향 마을에 남게 된다. 그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지만 사람들에게 그는 마을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고마운 이웃이다. 그런 그가 악덕 자본가에 의해 파산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돕기 위해 힘을 모은다는 내용이다.

영화가 끝난 후 토론 시간에 학생들은 저마다 소감 한 토막씩을 전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든지, 나도 사회에 나가면 조지처럼 소신 있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라든지, 조지처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주위의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준다면 인생에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는 다부진 생각까지 다양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요즈음의 어수선한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같은 건실한 지도자가 우리나라에도 많았으면 좋겠는데 잘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을 들으니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영화 속 조지 베일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도자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인생의 기로마다 이웃을 위해 개인적인 어려움을 감내하지만 그럴 때면 내가 왜 이런 희생을 해야 하는지 푸념에 빠지기도 하는 소박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지역 사회를 위한 활동들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조지에게서 발견되는 그늘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책임감을 가졌기에 감수해야 하는 아쉬움과 피로일 것이다. 그의 삶은 그렇게 한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꿈을 온전히 펼치지 못한 미완의 삶이요,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을공동체 안에서 그는 이웃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지가 세상을 냉소할 때 관객인 우리는 그를 아끼던 마을 사람들처럼 그의 버거움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 조지와 대비되는,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현실 속 군상의 면면을 떠올려본다. 개인적 고충 속에서도 이웃들을 돌보느라 생겨난 조지 베일리의 그늘과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여 시민들을 기만한 이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은 그 성질이 사뭇 다르다. 전자가 시민들의 꿈과 희망을 짊어졌기에 생겨난 것이라면 후자는 시민들의 꿈과 희망을 저버렸기에 씌워진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2017년 오늘의 우리에게 조지 베일리처럼 위안이 되어주는 인물들은 누구일지 질문을 던져본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이 조지 베일리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시민들은 우리 곁에서 작은 일 한 가지를 함께 끌어안고 헤쳐나간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조지 베일리같이 지역사회를 바로 세울 인물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우선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던 우정의 시간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 하나하나의 고유한 시간의 뿌리들이 얼기설기 엮여 우리 일상을 지탱시키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 속 누군가가 조지에게 건넨 책인 '톰 소여의 모험'의 맨 첫 페이지에는 "친구가 있다면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조지 베일리였고, 우리가 서로에게 그를 구해주었던 이웃들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아무도 작성하지 않은 리스트가 있다면, 그 리스트는 버려진 꿈과 희망을 다시 길어 올리느라 고단한 땀방울을 흘렸던 이들의 명단이 아닐까. 냉소를 거두고 손을 건넬 수 있게 해주었던 그 순한 기다림들에 희망을 걸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서로를 응원했던 이웃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그 리스트는 '화이트 리스트'라 부르면 좋겠다. 올해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 리스트를 작성해보자.

모퉁이극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