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대란대치(大亂大治)란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크게 어지럽혀야 크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의 대란대치. 홍 지사는 탄핵정국 이후 공사석에서 "나라가 혼란스럽다. 이런 때일수록 대란대치의 지혜가 필요하다. 크게 통치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가야 한다"라는 요지의 말을 자주 했다.

어원을 찾아봤다. 대란대치는 청나라 5대 황제인 옹정제의 지배전략이다. 대란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형제와 공신까지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사회기강을 바로잡는 데는 '부패와의 전쟁'을 활용했다. 관료의 부정을 감찰할 관료기구를 만들었다. 이런 강력한 통치에 그 자존심 센 한족도 무릎을 꿇었다. 오랑캐라며 무시하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한 한족의 반감은 잦아들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대란이 대치로 이어진 데는 경제 개혁이 결정적이었다. 국가의 수입 증대는 곧 국민의 밥그릇 증가로 이어졌다. 따뜻한 밥을 보장하지 못하면 백성이 등을 돌리는 게 세상 이치다.

옹정제의 대란대치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열었다. 뒤이어 권좌에 오른 건륭제가 중국이란 광대한 영토를 질서 정연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그것도 60년이나. 옹정제가 정적을 제거하는 악역을 맡았기에 건륭제는 평화롭게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 이후 중국 지도자들은 옹정제의 치세를 큰 본보기로 삼았다. 그 가운데 현실 정치에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200여 년 뒤 마오쩌둥이었다. "세상을 뒤엎는 데는 이치가 있다(造反有理). 세상을 크게 흔들어야 크게 다스릴 수 있다(大亂大治)." 마오쩌둥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반대파를 숙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앞서 마오쩌둥은 자급자족 공산 사회를 위해 시도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면서 실각했다. 권력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에게 넘어갔다. 이들의 수정주의 노선의 경제 정책은 성공을 거뒀다.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은 위기를 느꼈다. 이에 문화대혁명이란 대란을 일으킨다. 명분은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의 척결. 홍위병은 마오쩌둥주의자가 아닌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죽였다. 교육은 마비되고 유적과 유산은 파괴됐으며 종교 탄압도 극심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72만9500명가량이 박해를 받았고, 3만4800명이 죽었다는 게 중국 법원의 공식 발표다.

이렇듯 옹정제와 마오쩌둥의 대치는 완전 달랐다. 마오쩌둥은 옹정제처럼 대란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기존 틀을 깨는 데에 그쳤다. 옹정제는 황금시대를 여는 주춧돌을 놓았지만, 마오쩌둥의 대치는 혼돈과 재난만 초래하고 역사를 퇴보시켰다. 경제는 침체했다. 국민은 배고팠다. 문화혁명기를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다.

그렇다. 리더십은 그만큼 중요하다. 세상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조건이라도 사람 하기 나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더욱이 지금 우리 사회 대란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란 예기치 못한 사태에서 일어나지 않았나. 최고 권력자가 대치를 위해 대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대치를 준비하고 계획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게다가 올 상반기 중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6개월이나 앞당겨져 급작스럽게.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강력하고 새로운 리더십이 더 기다려진다. 메시아 같은 초인(超人)의 출현이.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이 불안감은. 증명되지 않은 동시대 인물의 자질을 알아보는 눈이 짧은 한계 탓일까. 그냥 지금의 대권 주자들은 고만고만해 보인다. 대치를 기대할 만한 리더십이 없는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그의 원칙주의자 이미지는 갈가리 찢어진 우리 사회를 통합할 만한 기운을 못 느끼게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서는 처세의 달인 고건 전 총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세상에 가득 찬 모순과 갈등을 헤쳐 나가는 리더십은 아직 보여준 게 없다.

온실 속 모범생 같은 국민의 당 안철수 전 대표에게 정글 같은 세상을 맡기기가 왠지 불안하다. 이재명 시장의 현란한 구호는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로 인한 반대급부만 노리는 것 같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서는 노 전 대통령의 또 다른 그림자만 느껴진다.

그래서 되짚어보고 반성하려 한다. 실패한 박 대통령을 국민이 뽑은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이미지만으로 리더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학습효과를 얻기 위해 우리는 너무 비싼 대가를 치렀다. 이제는 시대정신도 다시 확인해야겠다. 소수가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누구든 바로잡아야 하니까. 격차 해소라는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일이 탄핵정국에 가려지면 안 된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