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의 우승 소식이 전해졌을 때, 41년 전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한 것에 이은 한국 음악계의 신나는 쇼크라고 연일 뜨거웠다.

지난해 11월에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하모니카 연주자에게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호너(HOHNER) 아티스트'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 또한 크게 축하할 일이다. 전제덕은 가장 평범한 악기를 가지고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비범한 차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1박2일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마음먹고 준비해 간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기타를 잡았다. 1980년대 초에 발표된 버들피리의 '꿈 찾아가리'라는 노래를 통기타 반주에 맞추어 하모니카로 멜로디를 연주했다. 친구들은 예전 실력이 살아 있다고 엄살을 떨면서 앙코르를 요청했다. 하모니카 소리는 얼큰한 분위기와 함께 그 옛날 바닷가 모닥불과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를 그리워하게 하였다. 피아노는 구경도 못 해보고 학교에나 풍금이 있었던 유년 시절의 하모니카는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간단한 노래 한두 곡은 부를 수 있게 하는 소박한 악기였다. 그런데 하모니카에 대한 이러한 내 생각을 바꿔놓은 연주자들이 있다.

지그문트 그로븐이 연주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의 OST는 마음을 회생시킨다. 지중해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시인 네루다를 만나 우체부가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담았다. 지그문트 그로븐은 창 너머의 밝은 달, 일렁이는 파도 소리와 자전거, 메타포가 있는 이 영화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만들었다. '마이 로드(My Road)'를 연주한 리오스카는 자신의 이름을 딴 하모니카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의 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모니카'라는 악기가 그토록 멋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의 하모니카 연주는 쓸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유혹적이기도 하다. 리오스카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뛰어난 역량을 보였더라면 아마도 부모님과 주위의 사람들 때문에 하모니카가 아닌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하모니카 연주자가 되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하모니카 연주자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하여 매우 만족한다고 한다.

김정운 교수의 '공부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한다. 내 아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딴따라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 모두 축하한다며 어느 대학이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대학 이름을 대면 다들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그리 대단한 대학도 아닌데 호들갑이라는 표정이다."

당연히 축하해 줄 일인데도 소위 명문대학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는 말이다. 우리는 반만 년의 유원한 역사 속에서 가문을 많이 따졌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는가'에 더 비중을 두어 왔으며, 지금도 우리의 교육열은 일류 대학에 가기 위한 입시 열기이지 진정한 삶의 가치 추구와 자기실현을 위한 꿈이 아니다. 시시한 배우는 있어도 시시한 배역은 없다. 자신이 맡은 역할이 주연이냐 조연이냐보다 중요한 건 알맞은 배역이냐다. 행복의 기준도 적재적소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모름지기 학교의 역할은 아이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덕성, 지성, 근성을 길러주는 일과 더불어 적성을 찾도록 돕는 데 모여야 한다. 학교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왜 쓸데없이 위대함만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학벌과 재산이나 지위가 아니고 누가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위대함은 치명적인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처럼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며 살고 있는가.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되질 못 하고 팍팍한 삶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20세기 최고의 콘트라베이시스트 게리카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악기를 가지고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그 악기의 역사마저도 바꾸었다.

그렇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창조적인 도구가 악기라고 한다면 꼭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모니카 또한 자신의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멋진 서사(敍事)가 아니겠는가. 봐주는 사람 없어도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있는 꽃들, '노루귀'와 '현호색'을 생각하면서 전제덕이 연주하는 '봄의 왈츠'를 들어 볼 일이다.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