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1987년 6월 10일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30년 전 그날이 있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또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슴 저린 역사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해 학생 시위는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학들이 개강하면 다시 시작될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고자 전두환 정권은 무섭게도 매질을 해댔다. 이 와중에 형사들이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 박종운의 거취를 알아내기 위해 친구인 서울대생 박종철을 연행해 취조 중 고문을 가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분실에서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으나 경찰은 이를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사인조작 기자회견 내용은 이후 두고두고 회자됐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묻힐 뻔한 이 사건은 박종철 사망 직후 그를 처음으로 검안한 용기 있는 의사에 의해 고문의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어느 기자에 의해 신문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 전국을 정권에 대한 분노로 들끓게 했다. 결국 민주화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 국민의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하는 스모킹 건이 되었다. 당시 물고문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의사는 중대 용산병원에 근무하던 내과의사 '오연상'이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의사의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히 얘기했었다. 그는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지금은 조용히 개원의로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수사를 축소 은폐했던 검사들은 승승장구하여 누구는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이 되고, 누구는 당 대표도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되어 잘나가고 있다.

요즘 TV에 나오는 몇몇 의사가 있다. 누구는 우리나라 유명 국립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로 물대포로 사망한 농민의 사망진단서 문제로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리고, 누구는 대통령 성형 시술로 유명해진 강남에서 잘나가던 개원의이고, 누구는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대 병원장이다. 한 분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병사로 기재하여 비난의 중심에 섰다. 다른 분들은 2014년 4월 16일 비극적인 그날,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이, 이제는 거의 다 전모가 드러나서 실체가 거의 발가벗겨졌음에도 아직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모른다로 일관하여 TV를 보는 전 국민의 혈압을 오르게 하고 있다. 의사의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의사를 우리는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다.

30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시 돌이켜보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 민주화의 거대한 물줄기가 바뀌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언론인들은 보도지침을 이겨내고 신문에 기사를 냈고, 오연상 교수는 의료인으로서 최소한 사인은 정확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고문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실천들이 합쳐져 결국엔 사회가 흘러갔고, 그리고 바뀌었다.

지난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30주기였다. 지금 이 시대에는 30년 전, 1987년 1월 14일의 '오연상' 교수와 같은 의사가 필요한 때이다. 아니 의사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의 말과 실천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한층 더 합리적이고 나은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이 맹탕뿐인 청문회를 보면서 울분을 터트리는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백병원 소아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