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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인생 이등병, 이제 다시 시작이다

국정농단 사태로 얼룩졌던 아픈 현실 새출발 필요

새해엔 이등병처럼 용기 내 더 나은 삶 꿈꿔보자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1-12 19:40:04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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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일출을 본 지도 열흘이 훌쩍 넘게 지났다. 그런데도 이 땅에는 지난해의 '오물'들이 치워지지 않고 있다. 마치 침몰한 유조선에서 쏟아져 나온 시커먼 기름의 띠가 해안을 잠식하고 있어서 그 제거 작업에 진을 빼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 농단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라는 음모의 기름띠까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모멸과 분노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한 해 동안에는 나라 안팎으로 문화계의 생명력을 실감하게 하는 소식들이 이어졌다.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 그랬다. 문화는 참신한 변화에 도전하며, 그럼으로써 그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 미국의 팝 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인류 문화에 공을 남긴 예술가들의 밝고 투명한 리스트는 작성된다. 딜런은 저항 음악으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가수였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다면 즉각 블랙리스트감이었으리라.
   
문화계는 밝고 투명한 사회 공헌의 리스트에 있는 작고한 예술인들을 기리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한국의 음유시인 김광석의 20주기를 기념하는 일들이 작년 한 해 동안 이어졌다. '광야에서' '녹두꽃' 그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즐겨 불렀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민중가요를 핏덩이를 입에 물고 노래하듯 열창했던 그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블랙리스트 최상위에 이름을 올렸으리라.

문화예술인들은 정치인과 달리 음모를 꾸밀 일이 없다. 작품으로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 의식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들이 소중하다.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왔어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하는 이 차단한 시기에 김광석의 노래 한 소절이 자꾸 귀를 때린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등병의 편지' 한 소절이다. 군대 갔다 온 지 40년이 넘은 초로의 사나이에게 웬 이등병? 혹자는 의아해할지 모른다. 물론 노랫말은 특정한 대상과 상황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젊은 남자가 군에 입대하면서 부르는 노래만은 아니다. 같은 노랫말이라도 가수의 곡 해석에 따라 '주제의 확장성'을 갖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곡 해석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노래를 모든 사람이 함께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보편화시켰다. 이 노래를 '입영 노래'가 아니라 '인생 노래'처럼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한 상황과 개인적 처지에서 느끼는 것들이 예술 행위를 거치면, 우리 삶에 보편적 의식을 공명(共鳴)해줄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이등병의 편지'는 우리나라에서 징병제가 없어지더라도 계속 불릴 수 있는 인간 삶의 보편적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짐에 관한 노래다. 김광석도 그런 의미로 열창하곤 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순간에 '인생 이등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등병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다. 가슴 아프지만 지금 우리 처지에 맞는 말이다. 나라의 기강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새해를 새해처럼 시작하기에 엄두가 안 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동물인지 모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작의 의미와 중요성을 여러 차원에서 일깨워주는 말들이 전해오고 있는가 보다. 무엇보다도 문화가 상이한 다양한 나라의 언어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금언이 있다. "시작이 반이다." 이는 일단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잘 시작하면 반쯤 성공한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만큼 시작은 중요하다.

그리스어로 아르케(arche)는 시작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원칙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스 속담에 "시작이 모든 것이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원칙이 모든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칙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원칙에 따라 다음 일들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정한다. 지금처럼 원칙과 상식이 무너진 시대에선 그만큼 원칙을 잘 세우는 시작이 간절하고 소중하다.
입문식 또는 성인식을 뜻하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은 '시작하다'는 어원에서 유래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새로이 시작하기 위한 통과의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는 고통이 따른다. 지금의 고통이 우리 현대사에서 더 평등하고 더 공정하고 더 자유로운 공동체를 위한 통과의례이기를 바란다.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모든 희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광석의 노래는 시작을 망설이는 우리 인생 이등병들을 좀 더 감성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삶의 고비마다 우리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다. 경험 많은 '일상의 병장'도, 성공의 정점에 있는 '인생의 대장'도 강등의 고비가 오면 이등병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등병의 계급이 옆으로 누운 작대기 하나인 것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직시하고 다짐을 해야 한다.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나라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듯한 그라운드 제로의 상황에서 허탈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가객은 외치듯 노래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모든 일은 젊은 날의 생처럼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의 생명력과 추동력이 있겠는가. 의지가 생동하지 않는다면 실행의 의미도 상실되리라. 생동하는 의지라면 이등병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헛된 자존심도 없으리라. 부끄러워했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용기에서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과거와 지독하게 단절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아쉬움은 남게 마련이다. 시작은 어렵다. 삶의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정지 마찰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면, 모두 함께 "두 손 잡던 뜨거움"으로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꿈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면, 새로운 시작은 항상 충분히 가능하다.

철학자·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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