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은 지난 몇 달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1688년 영국 의회가 제임스 2세의 폭정을 피 흘리지 않고 무너뜨린 사건을 가리킨다. 작년 가을 시작된 우리의 촛불시위는 비가 오거나 한파가 닥치거나 끄떡없이 이어졌고, 그 많은 사람이 모여서도 질서와 비폭력을 지켜냄으로써 저들이 뒤집기를 시도할 빌미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스탠스가 모호한 군상의 집합체인 국회의 등을 떠밀어 압도적 탄핵을 가결하게 만들었다. 이만하면 우리가 300여 년 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을 떠올리는 것이 그다지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명예혁명은 미완이다. 그것은 놀랍도록 뻔뻔한 저들이 여전히 버티기를 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국정 공백을 생각하면 이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속이 타지만 이는 어떻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역사가 명예혁명을 기억하는 건 그들이 단지 피 흘리지 않고 폭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서가 아니다. 그 사건의 핵심은 유럽 강국들의 패권 경쟁에서 뒤처져 있던 섬나라 영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인공이었던 지리상 발견으로부터 무역의 절대 고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의 산업혁명에 이르는 드라마틱한 15~18세기 유럽 패권이동을 '포용'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막대한 보화를 빨아들이고서도 번영하지 못하고 100년간 물가가 3배로 상승하는 재앙만 겪게 된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아이러니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엄혹한 가톨릭 군주 필리페 2세의 종교적 탄압을 꼽는다. 그가 이교도 유대인과 무어인들을 축출해 버린 통에 금융전문가의 씨가 말라버려, 스페인은 신대륙으로부터 쏟아져 든 귀금속을 슬기롭게 관리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천상의 자연환경을 가진 프랑스가 산업시대의 선두주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산업혁명의 중심축인 증기기관을 처음 개발한 것은 17세기 말 프랑스 물리학자 드니 파팽이었다. 그러나 파팽은 탄압받는 신교도였으므로 그의 시제품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시연되었다. 그리고 100년 후 그 영국에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탄생하게 된다. 종교적 편협함에 매몰된 프랑스는 16세기 후반 위그노전쟁 이후 긴 세월 동안 유능한 인재들을 이웃 나라로 유출한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누린 것은 영국이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로 1만 명의 신교도가 살해되었을 때, 그리고 1685년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로 종교의 자유가 다시 억압되면서, 프랑스의 신교도 위그노들은 대거 해외로 빠져나간다. 그들은 대부분 상인과 자본가 등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도시 엘리트였다. 영국은 네덜란드 장인과 프랑스 위그노를 포용하여 적극 영입함으로써 산업혁명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명예혁명으로 실권을 쥔 의회는 쏟아지는 청원들을 슬기롭게 처리하며 이류국가 영국을 세계의 패자로 우뚝 세우게 된다.

이렇게 보면 '포용'은 나라의 국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현명한 지도자와 국민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책 속 스페인과 프랑스의 편협함을 비웃으면서도 우리의 사고를 그보다 더한 굴레에 가두고 산다. '좌빨'과 '꼴보수'란 단어로 상징되는 극심한 진영논리가 그것이다. 합리적이던 사람도 진영논쟁의 언저리에 이르면 사정이 없다. 사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맞는 사실만 골라 논거를 만들 뿐이다.

촛불이 경이롭지만 그것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명예혁명을 완성하려면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의회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 청문회에서 보여준 일부 의원의 민낯에 경악하였지만, 그들을 여의도로 보낸 것은 사람을 들여다보지 않고 진영에만 표를 던진 우리 자신이다. 정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유권자가 진영싸움에만 매몰되면 지금처럼 그에 능한 인사들만 득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영을 막론하고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을 포용함으로써,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사익을 위해 진영을 가르는 정치인과 나쁜 언론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촛불을 추억거리가 아니라 온전한 명예혁명으로 역사에 기록하려면 이제는 정말 그리해야만 한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