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없는 나무가 있는가. 한평생 전쟁고아 보호와 미군 유해 반환 활동에 헌신하신 한묘숙 여사가 지난 1일 소천하셨다. 향년 90세. 여사의 남편은 지금의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부지 마련에 큰 도움을 줬던 리차드 위트컴(1894~1982) 전 유엔군 부산군수사령관이다. 지난 4일 부산대학교장으로 여사의 영결식을 치르고 유엔기념 공원묘지에 영면하고 계신 남편 옆에 유해를 모셨다.
한 여사와 나의 첫 만남은 2013년 11월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 박사(1903~1986)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우리 대학은 여사를 처음으로 초대해 '60년 만의 감사 음악회'를 열어 드렸다.
아주 작은 키에 선하고 앳된 소녀 같은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이었다. 연거푸 고맙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이후 서울 출장길에 몇 번 여사를 찾았다. 1·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국 장군 미망인의 거처 치고는 너무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셨다. 내가 내려고 하는 밥값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웃음은 없었지만 맑은 눈동자로 한국과 부산의 현대사 단편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씀해 주셨다.
1953년 11월 27일 발생한 부산역 대화재. 29명이 죽고 불탄 집이 6000여 가구에 이재민이 3만 명이 넘은 대재앙이었다. 당시 유엔군 부산군수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은 군수물자를 풀어 천막을 짓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 군법을 어긴 것이다. 장군은 미국 본국의 청문회까지 불려가 질책을 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승리하는 게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는 명언을 남기며 오히려 미국 의원들의 기립박수와 함께 더 많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부산 시민은 장군을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는 모른 채 사진만 남아 있다.
부산대와의 인연은 이렇다. 해방 직후 국내 최초의 종합 국립대학으로 출범한 부산대가 캠퍼스 부지가 없었다. 1954년 윤인구 초대총장은 종 모양으로 그린 캠퍼스 배치도 한 장을 들고 위트컴 장군을 찾아가 "교육에 대한 내 꿈을 사 달라"고 부탁한다. 감동받은 장군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서 50만여 평의 장전동 적산부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또 한국민사원조처(KCAC)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시설 공사를 하도록 도왔고, 미 공병부대를 동원해 온천동과 부산대를 연결하는 도로도 놓아 준다.
1954년 어느 날 장군은 난민촌 부근 보리밭에서 여성의 비명을 듣는다. 급히 가보니 한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장군은 의료시설 보급이 절실하다고 여겨 지금의 부산 메리놀병원 건립에 앞장선다. 부대원의 월급을 1%씩 기부하도록 했고, 직접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서 거리 모금 캠페인까지 벌인다. 이것만이 아니다. 예편 후 장군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돌보는 고아원을 짓고 후원하는 사회사업을 선택했다.
당시 한묘숙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 법인 익선원(益善院)을 설립, 전쟁고아를 보살피는 나눔과 헌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위트컴 장군과의 만남은 익선원을 방문하고 도우면서 시작되어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여사는 명망 가문의 딸이었다. 언니가 1993년 작고한 여성 소설가 한무숙 씨, 동생 역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인 소설가 한말숙 씨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여고를 입학하고 서울로 전학했다.
장군의 마지막 사명은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몰살당한 수천여 명의 젊은 미군 병사의 유해를 찾아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1982년 서울에서 돌아가신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유엔기념공원 묘지에 묻힌 유일한 미군 장성이다. 운명 당시 한 여사는 미군 유해 송환 협상을 위해 중국을 방문 중이었다. 그 이후 여사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위트컴 희망재단'을 설립하고 북한을 25차례나 방문했다.
여사의 침대 옆에는 장군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결혼 후에도 장군은 미군 장교의 원칙을 지키며 속내의 빨래는 손수 하셨다고 한다. '한국인보다 부산과 한국을 더 사랑한 휴머니스트 장군 옆에 묻히는 것이 희망'이라고 하셨던 여사의 마지막 말씀이 생각난다.
파란 눈의 휴머니스트와 그와 뜻을 함께한 부산의 마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뿌리를 잊은 나무가 하늘을 향해 무성한 꽃잎을 피울 수 있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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