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시골 나들이, 평일이라 그런지 뻥 뚫린 고속도로는 시원스럽다. 그에 비해 휑하니 수확을 끝낸 들녘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소담스럽게 포개 놓은 볏짚이 듬성듬성 논을 에워싸고, 들녘을 에두른 산에 가을을 풍미하던 단풍은 흙빛으로 바람에 휘날렸다.

어느 곳이나 울퉁불퉁 시골길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지 차를 요란스레 흔들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요동치는 차로 산자락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차에서 내렸다. 길옆으로는 배추 무밭이 산자락에 비스듬히 펼쳐져 있고, 수확을 끝낸 밭에는 트럭의 바퀴 자국이 두 줄로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버려진 밭에는 언뜻 보아도 성하고 통통하게 살찐 배추 무가 꽤 되었다. 가까이 가보니 벌레 먹어 송송 구멍이 뚫린 것을 제외하고는 별반 못 쓸 것들도 아니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추 잎을 서너 겹쯤 벗겼을까. 뽀송뽀송하고 노르스름한 배춧속이 앙증맞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양념된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고 맛날 것 같았다. 벌써 내 입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누가 이런 것들을 버리고 갔을까. 중개상의 입장에서라면 인건비나 운송비도 나오지 않아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을 것이다. 짙푸른 녹색으로 둘러싸인 통통한 배추를 팔면 이문이라도 넉넉히 남을 테지만 이런 것들을 상품(上品)으로 팔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부쳐 먹던 밭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었던지 여느 시골 자락 작은 마을 같은 배추밭 주변엔 허름한 몇 집이 덩그러니 밭을 지키고 있었다. 돌밭, 버려진 들판을 아우르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집 굴뚝에서는 막 점심밥을 짓는지 푸르딩딩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마당 한쪽에서 졸고 있던 개가 컹컹 짖어 댔다.

나는 마당을 기웃거리다가 댓돌에 놓여 있는 고무신에 눈길을 멈추었다. 바랜 고무신은 뒤축이 헤졌는지 기운 흔적이 역력했다. 사람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에 누구 없나요?" 소리쳤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좀 더 크게 소리쳤다. 그랬더니 부엌인 듯 방 옆 작은 쪽문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머리에 땟국이 자르르 거무튀튀한 수건을 두른 할머니 한 분이 삐죽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예순이나 일흔 살은 되어 보였다. 가는귀 먹어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려 한다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뭐라고?"만 했다.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물 좀 얻어 마시러 왔어요!" 그제야 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할머니는 함지박에 물을 한가득 담아 오셨다. 보기에도 시골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는 밭에 왜 그렇게 배추 무를 버려두셨냐고 여쭤 보았다. 할머니께서는 이마에 가득한 주름을 접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 그거, 그놈의 장사치들이 내버려 두고 갔지 뭐야!"

얘기인즉, 연전에 서울서 장사치들이 내려와 좋은 값을 치러줄 테니 밭에 배추 무를 심어 달라고 해서 심었는데 좋은 것들은 다 뽑아 가고 쓸모없는 것들만 내버려 두었단다. 값은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저 셈을 잘해준다는 말만 듣고 심었는데 가져간 것보다 버려진 것이 많다는 것밖엔. 그러면서 나보고 필요하면 가져가라 했다. 혼자 사는 늙은이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며. 당신은 겨우내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고도 했다. 어차피 버려진 배추 무는 썩어 거름밖에는 되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도시 아파트에서 사람들을 모아 와 그들에게 시골 풍경도 즐기게 하고, 밭에 버려진 쓸 만한 배추 무를 거두게 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는 시장에서보다 값싸게 얼마만큼의 채솟값만 받고 나머지 이익은 할머니에게 드린다면. 아니 마을 이장에게 부탁해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배추 무도 버려질 일 없고, 시골 마을엔 수입도 생기고,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을 성싶었다. 배추 무 '수확여행'. 좋은 생각일 것 같았다. 할머니께 물 잘 마셨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할머니는 "무얼, 그냥 가지고 가.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걸!" 하신다.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배추밭에서 노릇노릇 배추 고갱이를 몇 포기 가져왔다. 집에 와서는 된장을 발라 와삭와삭 맛나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아파트 이웃들에게 수확여행 가자고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추 무 수확여행 말이다.

배추 한 포기가 몇 천 원에 육박하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금배추란 말까지 돌 때가 있었다.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닌 게 세상살이라고 하는가 싶게 배추밭을 갈아엎는 모습도 매스컴에 나온다. 수확량을 예측 못 한 농사의 한계겠지만 애써 가꾼 채소를 갈아엎는 농부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런 생각이 가슴을 후벼 판다. 그러기에 더욱 배추 무 수확여행을 가자고 친구라도 꼬드기고 싶은 것이다. 겨울 들판에 동그마니 떨고 선 배춧속 노란 고갱이가 고소하게 씹히는 것 같아 벌써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국립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