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차다. 새벽에 길을 나서기는 오래간만이다. 외투를 한껏 껴입고 목도리까지 둘둘 말았는데도 찬 기운이 서린다. 늘 다니던 길도 낯설기만 하다. 긴가민가하며 고속도로에 진입했건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차가 꽤 많다. 마음은 바쁜데 차들이 더디 움직인다. '늦으면 안 되는데…'. 걱정한다고 좀처럼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외할머니의 부음이 날아든 것은 분주했던 아침 시간이었다. 뒤늦게 문자를 확인하고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언제고 있을 일이었는데 왜 그리 아득하기만 했던지. 요양병원에 모신 지 6여 년, 다리도 못 편 채 수척하다 못해 메마른 데다 올해 들어선 잠결이기만 바라셨다. 웬만해선 눈도 뜨지 않고 자고 싶으신지 여쭈면 그제야 "네"하고 답하셨다. 그것도 아주 공손하게. 평생을 일에 허덕이다 겨우 찾은 노년조차 병마에 온전히 내준 당신.

강짜라도 부릴 법한데 외할머니는 면벽수행을 하는 듯했다. 온종일 벽만 쳐다보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떠올릴 생각조차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기 위한 마음공부를 하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가파르게 듬성듬성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찾아온 이들을 온화한 웃음으로 맞이하셨다. 막상 누군지 아시느냐고 여쭈면 "몰라요" 하셨다. 한참을 웃고 말았다. 병증에 쭈뼛하던 가족들도 그만큼 자연스러워졌건만, 그조차 호사였던 걸 그땐 몰랐다.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저녁 햇빛 속에/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수척한 물새 하나/생각에 잠겼는가/냇물을 굽어보는가/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조으는가//조으는가/꿈도 없이." 황동규 시인의 '풍장 70'이 새삼 떠오른다. 풍장(風葬)은 초막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풀로 덮어 탈골될 때까지 놓아두는 장례 방식이다. 그로써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죽음에 서서히 친숙해지도록 한 것이다. '풍장' 연작은 작가에게도 죽음 길들이기의 산물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대결하던 작가의 시편은 어느새 일상 속에서 죽음을 삶과 더불어 친숙하게 벗하고 관조하기에 이른다. 연작의 백미이자 마지막 시편인 '풍장 70', 물처럼 살아온 물새의 삶은 물로 마무리된다. 이미 물새와 물의 분별을 알 수 없고, 꿈과 같은 상(像)조차 불필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함께 어울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죽음을 대면하는 우리의 현실은 거기에 비켜서 있게 마련이다.

화장장으로 운구하는 동생들을 뒤따르며 가족 모두 숙연해진다. 햇살조차 허락하지 않은 아침, 외할머니의 옛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유달리 아꼈던 첫 손녀, 그런 손녀가 당신보다 먼저였던 일들만 아리게 다가선다. 앓아누운 손녀를 위해 겨울날 칼바람에도 산을 헤매며 약재를 구해 오셨던 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광주리 한가득 산딸기를 따오셨던 일, 청국장을 손수 띄워 비지찌개를 맛나게 끓어 주셨던 일 등등. 비단 첫 손녀만 그러했겠는가. 7남매의 손자 손녀 모두 상주인 양 장례를 끝까지 지켰던 것도 당신과의 기억이 유달랐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리라.

화장장 안에 도착한 것도 잠시, "망자와 마지막 인사를 하세요"라는 말에 멈칫한다. '마지막이구나'. 관을 쓰다듬는 손이 떨린다. 하나둘씩 손길이 겹쳐지며 가녀린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너나없이 슬픔이 복받쳐 당신을 애타게 부르는 울부짖음이 뒤섞이고 만다. 화장장의 빨강 불을 애끓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당신을 잃은 아픔만 가슴을 후벼 판다.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 죽음이 찾아올 때는 너는 이미 살아 있지 않고,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은 오지 않았으니까. 헤어짐이라는 게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누구나 다 자기에게 눈길을 던져준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감사드리고 그 존재를 귀하게 생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신현림이 가려 뽑은 구절을 다시 읽는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죽음을 바라본다. 죽음은 지독한 고뇌와 슬픔을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우리네 삶을 차분히 헤아리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묘하게 위로가 된다.

유독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병신년, 그래도 우리가 살고자 하는 세상이 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공분들이 추모 포스트잇의 물결을 이루더니 다시 천만 명에 달하는 촛불집회를 끌어냈다. 숙제도 희망도 기꺼이 간직하기로 한다. 그리고 한 해를 함께 잘 버텨내 준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자. 진심 다한 말도 좋지만 촉감의 울림을 전해보자. 촉감은 오랫동안 기억되고 그리워하며 진실한 사랑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토닥토닥 두드리는 어깨의 울림을 간직하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의 따뜻한 감각을 떠올리게 하자. 촛불을 밝히던 마음으로 꼭 껴안아주면 더없이 좋으리라. 그렇게 그들에게, 병신년에 '고생 많았다, 감사하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