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돌이켜보건대 그동안 격정적으로 나라 걱정을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먹고살기에 급급해서'다. 그냥 제 한 몸 건사하면서 이웃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면 민주시민의 본본을 다하는 거라 여겼다. 내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이들이 나서서 나라를 잘 이끌어주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 까닭에 누구를 찍든 선거는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뭐 이런 건 평범하게 살아가는 장삼이사들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참, 엄밀히 따진다면 '국가와 민족'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 시늉을 냈던 때가 있기는 했다. 혈기방장하던 20대 때다. 군사정권이 존재했던 1980년대 초반의 세상은 온통 모순투성이었다. 갓 성인이 된 젊은이에겐 더욱 그랬다. 사회는 중·고등학 때 배웠던 민주주의 원칙과 달리 돌아가고 있었다. 딴에는 왜 그럴까라는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젊을 때 진보에 한 번쯤 빠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새삼 진리처럼 다가온다. 뭔가 거창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당시를 살았던 젊은 층의 공통된 경험인지라 개인만의 특별한 것은 못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주제 넘게 나라 걱정은 무슨…'이라며 스스로를 내려놨다. 이런 안이함을 깨뜨려 준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래서 참 고맙다. 박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 집회'를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터다. 100만 인파가 도심을 뒤덮어도 최루탄 한 발 터지지 않는 믿기 힘든 광경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진리 역시 온 몸으로 체험하기는 불가능했을 게 분명하다. 나아가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의 참뜻을 알기도 쉽지 않았을 법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이 처음 터져 나온 게 지난 9월. 그 이후의 시간은 모든 이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변화무쌍했다. 헌정 역사상 정치권 비리로 이처럼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린 적이 있었던가 싶다. 최 씨 일당의 비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거져 나왔다. 이와 비례해 국민들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게다가 이 와중에 드러난 박 대통령의 무능함과 나태함은 또 어떤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다. 유권자들이 뽑아준 대통령 대신 허깨비가 그 노릇을 대신하고 있었다. 눈이 열 개, 귀가 열 개라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했다. 행여 나라가 결딴나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들 만했다.

한 나라가 평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으로는 통일신라 향가 '안민가'만한 것이 없다. 승려인 충담사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경덕왕의 부탁을 받는다. 이에 충담사는 10구체 향가를 지어 바친다. 백미는 마지막 두 구절이다. 충담사는 '왕이 왕답게, 신하가 신하답게, 백성이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나이다'라고 못 박는다. 촌철살인의 문구다. 지나간 일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필요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안민가의 존재라도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처지는 피했을지 모른다.

안민가를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적용시켜본다. 박 대통령? 애초부터 박 대통령에게 '답게'라는 책임감은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그걸 기대한 게 어리석었음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나라를 파탄 위기에 몰아넣은 뒤 직무정지를 당하고도 하는 말이 고작 "피눈물 난다는 말 뜻을 알겠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매도당해 안타깝다" 정도다. 그냥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김기춘 우병우 등 고위 관료? 국민을 가벼이 여긴 채 오로지 윗선만을 쳐다본 무리에 불과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들에게 '답게'는 자신들의 힘을 휘두를 때 뿐이었다. 친박세력? 언제 타죽을 줄 모르고 대통령을 쫓아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과 뭐가 달랐던가.

그럼 국민은? 단언한다. 무능한 정권과 썩어 문드러진 관료와 달리 오직 국민만이 제 할 일을 했다. 제 식구 챙기기에도 바쁠 우리 이웃들이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인하려 수주 동안 거리를 가득 메웠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을 촛불이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어둠을 밝혔다. 생업에 써야 할 손으로는 '박근혜 퇴진'이라는 문구를 들었다. 독재정권에 맞섰던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다시는 보기 어려울 듯했던 성난 민심의 행렬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도도한 흐름은 끝끝내 박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 냈다.

며칠 후면 해가 바뀐다. 누구나 새해에는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년에는 나라가 잘 되라고 오랜만에 '거창한 소원'을 빌어볼까 한다. 내친 김에 내년 말에는 제발 올해와 같은 참담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촛불 혁명'을 이뤄낸 대다수 국민도 마찬가지 생각을 할 성싶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