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이 사건을 한마디로 줄이면 '부패한 권력의 향기에 도취한 반칙자들이 자신들의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위해 국가시스템을 통째로 무력화시킨 막장극'이다. 결국 분노한 수백만 명의 국민은 엄동설한의 차디찬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고, 스스로 뽑았던 대통령까지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은 국정 공백이나 헌정 중단보다 국가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더 큰 가치라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혹자는 평범한 강남아줌마가 저지른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하고, 혹자는 권력집중의 '제왕적 국가통치시스템'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말한다. 종합해보면 국가를 이끄는 핵심 구성원의 총체적 부패가 원인이다. 그런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재벌이다. 어쩌면 이번 사건은 재벌의 '권력포획'이 빚어낸 '예고된 참극'이 아닌가 싶다. 거대자본을 앞세운 재벌들에 의해 국가통제시스템과 사회감시망이 무력화되면서 발생한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의 공범자로 지목된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수석, 민정수석, 장차관, 고위공직자는 물론 수많은 국가기관이 재벌들의 이해달성을 위해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를 받는 점도 그런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재벌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이 사건의 '주범'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단지 최순실과 비선 실세, 부패한 권력자들의 장단에 맞춰 춤췄을 뿐이라는 항변이다. 그들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이 사건의 '주범'에 버금가는 '공범'이다. 부패한 권력자들의 검은 속내를 꿰뚫은 재벌들은 검은돈을 밑밥으로 던지고 그물망을 쳐두었다. 사실 재벌들이 쳐둔 그물에 부패한 권력자와 조력자들이 걸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표면상 재벌들은 이 사건의 '기획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적극적 조력자'일 개연성이 크다.

재벌들은 이 사건의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진실을 고백하지 않은 채 침묵한다면 '숨은 기획자'의 오명까지 덮어쓸 수 있다. 물론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기가 싫을 것이다. 자칫 진실을 고백한 뒤 쏟아질 거센 비난과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재벌총수들은 국회 청문회에서 '바보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흔들리는 동공과 눈빛은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한 재벌총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며 후회까지 했다. 이 막장드라마가 초래한 국가혼란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재벌들이 숨기고 있는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무엇인지 국민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진실은 외면할 수는 있어도 결코 영원히 묻을 수 없다.

설사 재벌들이 묵비권을 행사하더라도 국민은 이렇게 믿고 있다. 경영승계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수를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면세점 사업권을 받기 위해, 사업상 편의를 담보받기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재벌의 속성상 대가 없는 비용지출은 결코 없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추진한 공공사업도 아닌 개인이 설립한 사설 재단에 거액을 쾌척했다면 '자발적 기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는 없다. 심지어 한국을 대표하는 한 재벌은 최순실 부녀에게 직접 수백억 원의 거액을 은밀하게 건넸다. 그런 검은 거래를 '선의'로 포장한다면 말장난에 불과하다.

재벌들의 '양심고백'은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현재 대다수 한국 재벌은 중대한 내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경영권 승계라는 당면과제가 있다. 현재 상당수 재벌이 경영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거나 경영승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재벌들은 경영승계 과정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은 예전과 달라졌다.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법망과 감시망은 더욱 촘촘하게 짜이고 있다. 정경유착을 통한 권력포획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시대착오일 것이다.

설사 감시망을 피해 편법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들 치유하기 불가능한 우환거리로 남을 뿐이다. 재벌의 젊은 후계자들은 앞으로 수십 년간 경영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들이 숨기려고 하는 '불편한 진실'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 꼬리표가 될 수도 있다. 당당한 미래를 위해 부끄럽지 않은 오늘의 역사를 써야 한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재벌들의 '양심고백'은 그동안 한국경제의 밑바닥에 천착되어 있던 정경유착의 질곡(桎梏)을 벗겨내는 첫걸음일 것이다. 또다시 한국 재벌에게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지금 재벌들이 '양심고백'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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