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영화과 후배였다. 후배라고 하지만 나이 차가 있어서 학교를 같이 다닌 적은 없다. K를 처음 만난 건 청소년 연극을 제작하는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때다. 나보다 먼저 입사한 K는 회사에 불만이 많았지만 통장에 꾸준히 쌓이는 쥐꼬리만 한 월급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그보다 늦게 들어온 배우 디자이너 기획자 기타연주자 연출은 회사를 떠나고, 얼마 후 회사가 폐업했다. 직장을 잃은 K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왔다. 사회적기업에 다니던 2년 동안 출퇴근 시간을 한 번도 어긴 적 없었던 K의 유일한 장점은 성실함이다. 그걸 제외하고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이 없다. 말할 때 사람을 잘 쳐다보지 않고, 헤드폰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세상과 차단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때 안 타는 희미한 색깔의 윗옷에 후줄근한 청바지를 즐겨 입고, 등이 구부정하고 심한 8자 걸음에 어눌하고 느릿느릿한 말투까지 더해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K가 모태솔로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스무 살 이후 단 일주일도 솔로인 적 없던 내가 크리스마스이브에 K를 만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토요일 오후 6시30분, 그것도 서면 교차로 한가운데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악수했다. DJ DOC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노래를 끝내자, 드문드문 빈자리가 생겼다. 얼른 자리를 잡으려는데, K가 만류하며 팔을 잡아끌었다. "무대가 너무 가까운데 뒤로 가입시더."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다음 출연자인 부산 밴드, 액트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메인보컬을 맡은 여배우는 연극무대에서와는 다른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녀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K의 팔에 이끌려 다시 인도로 올라가 시립예술단의 위탁운영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고, 철창에 갇힌 범죄자 퍼포머들과 인증 샷을 찍고, 아는 사람들 몇몇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두리번거리다 대열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몇 시간 전까지 부산 시내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았을 서면대로는 차 대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에 앉으며 투덜거리던 K가 인상을 찌푸렸다. 보컬의 카랑카랑한 노랫소리가 서면교차로를 들썩이게 했지만,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머리가 어질했다. 자리 바로 옆에 스피커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화가 난 것도 아닌데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스피커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K가 손짓을 한다.
"여기는 경찰들 때문에 불편하다 아입니까. 저기 저쪽으로 가요." 그러고도 두세 번 더 자리를 옮긴 뒤에야 드디어 촛불을 꺼내 들 수 있었다. K의 까다로운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나온 집회 분위기가 낯설어 예민해진 나는 구호를 함께 외치자는 사회자의 요구에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바닥의 냉기 때문에 엉덩이를 달싹거리며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찰나, K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깔고 앉으세요." K가 생명처럼 여기는 헤드폰을 싸는 뽁뽁이 포장지였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K의 고집에 밀려 뽁뽁이 위에 앉았다. K의 뽁뽁이는 공기가 탱글탱글하게 들어있었다. 몹시 푹신하고 따뜻했다. 물론 내가 노래를 따라 부르고 피켓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는 동안 '뽁뽁' 소리를 내며 절반 정도 터져버리긴 했지만.
합창하는 동안 K가 뜻밖에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알았다.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도 귀에 익은 구슬픈 느낌이 마치 김광석을 성대모사를 듣는 것 같았다. K가 김광석을 좋아했던가. 그러고 보니 K의 헤드폰에서 무슨 노래가 나오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소리를 밀어내던 K가 듣던 노래는 뭐였을까. 아니,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K를 세상 속으로 나와 길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였다.
집회가 끝나고 뽁뽁이 대여료랍시고 밥을 샀다. 공사일 할 때의 습관인지 국밥에 코를 박고 마시듯 하는 K의 먹성에 감탄하다가 정수리의 원형탈모가 눈에 띄어 물었다. "아, 이거…. 그때 4월에 충격 받아서 생긴 거예요. 없어지지도 않고 계속 있어요. 끝나고 나서 치료받아야죠, 뭐."
나는 실실 웃는 K의 그릇에 순대 두 개를 올려주며 2016년 마지막 토요일에도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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