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본(民本)은 고려 왕조를 통째로 무너뜨린 정도전이 가슴에 새겼던 최고의 가치였다. 20대 중반 연이어 부모를 잃고 3년 시묘살이할 때 정몽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받는다. 바로 '맹자'다. 이내 심취한 정도전은 일부러 하루 반 장밖에 읽지 않았다 한다. 담긴 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적용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기 위해서였다고. '민위귀(民爲貴)하고 사직차지(社稷次之)며 군위경(君爲輕)이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나라는 그다음이며, 왕은 가장 가볍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백성 우위' 사상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정치·역사서인 서경(書經)에서부터 이미 등장한다. '천시자아민시(天視自我民視)요, 천청자아민청(天廳自我民廳)이라'. 백성의 눈이 하늘의 눈이요, 백성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라는 뜻. 이 평범한 진리가 수천 년에 걸쳐 반복 강조되는 것은 현실에 뿌리내리기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리라.

정치(政治)의 요체는 한자의 뜻에 잘 담겨있다. 정(政)은 내가 먼저 바르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그런 뒤 남이 바로 서도록 추슬러 주는 게 치(治)다. 헝클어진 나라의 질서를 실 가닥처럼 가지런히 하여 백성들이 제각기 직분에서 잘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치라는 혹자의 정의가 새삼스럽게 와 닿는 요즘이다.

어느 누구보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정치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함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민(民)을 배반한 정치로 나라를 파탄 나게 만들었으니 소름 끼치는 '君舟民水(군주민수)'를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게다. 순자의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말로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촛불에 탄핵당한 박근혜 정권의 말로를 이보다 더 꿰뚫는 글귀는 없을 터.

2016년을 정리하는 사자성어가 어디 그뿐이랴. 최악의 취업난을 빗댄 '구지부득(求之不得)'은 또 어떤가. 아무리 일자리를 구해도 구할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직장인들의 처지는 '구복지루'(口腹之累)'다. 구복(口腹)은 '입과 배'를 말하는데, 죽도록 일을 해도 늘 먹고사는 게 걱정이라는 자조가 섞여 있다.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만을 풀어줄 만하도다". 옛날 순(舜) 임금이 오현금을 타면서 불렀다던 태평성대의 노래. 우리에게 '남풍'은 언제쯤 오려나.

변영상 수석논설위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