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에로스(Eros·사랑, 삶)의 존재이고, 싸나토스(Thanatos·죽음)의 존재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다. 삶 없는 죽음이 있을 수 없고, 죽음 없는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이며,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죽음에서의 품위는 삶의 품위와도 직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감(dying)이나 죽음(death)을 싫어한다. 죽어감이나 죽음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고, 인간의 본능이다. 오직 살아감(living)이나 삶(being)만 추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가장 원초적인 본능만을 좇는 인간의 삶은 천박하다. 살아감과 삶만 추구하는 삶은 진정한 방향성을 상실하고 품위 낮은 삶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현대인은 살아감과 삶에만 매몰된 나머지 스포츠에 몰입하고, 심지어 술과 담배 섹스 마약을 탐닉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육체와 정신, 혼까지도 황폐해진다.
좋은 죽음(good death)은 적절한 죽음(appropriate death) 웰다잉(well-dying) 존엄사(dying with dignity) 등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고, 대체로 품위 있게 맞이하는 임종이란 뜻이다. 죽음이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종국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불가항력적 사건이지만, 의지가 있는 의미적 존재로서 사람의 죽음은 여타 사물의 죽음과는 구별돼야 한다. 사람의 죽음은 '의지 활동의 종결' 또는 '의미 추구의 완결'을 의미하므로, 이런 존재론적 위상에 걸맞은 품위 있는 생의 마감을 위한 '준비된 죽음'이 필요하다. 준비된 죽음만이 좋은 죽음일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하고 싶은 과업과 해야 할 과업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죽음이 되지 못하고 나쁜 죽음이 된다. 심지어 임종 환자가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한으로 남기도 한다. 진정한 품위 있는 삶은 죽어감, 죽음, 그 이후까지도 배려한 삶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죽어감, 죽음을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죽어감과 죽음을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죽어감이라는 것과 친해지고, 아름답게 죽어가는 연습을 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 존재다. 품위 있고, 행복하게 죽는 존재가 돼야 한다. 그러면 우리 가정, 사회, 국가는 '품위 있고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삶의 질만큼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관심은 삶의 질에만 집중됐고, 상대적으로 죽음의 질에 무지했고, 무관심해 왔다. 임종 순간은 장구한 인생에서 볼 때는 비교적 짧은 시간이지만, 삶의 어느 순간이나, 기간보다 중요하다. 일이든, 상품이든, 인생이든, 끝마무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얼마나 잘 정리하고, 평화로운, 평안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가는 중요하다. 이제는 삶의 질뿐 아니라 죽음의 질도 생각할 때가 됐다. 우리 인간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얼마나 품위 있게 잘 죽는가도 중요하다. 좋은 죽음을 위해, 죽음 준비를 잘해서, 품위 있는 마무리를 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한 번 침해되면 회복 불가능하고, '리셋'이 안 된다. 그렇기에 생명에 관한 결정은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인격체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인간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단순한 생명 연장이나 무의미한 생명 연기는 그 자신과 가족에게 존엄과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회생할 가능성이 있고 인내할 가치가 있을 때만 의미 있다. 인간은 품위를 지킬 때 더욱 인간다워지고, 존엄성을 가진다.
사전의료의향서(사전연명의향서)는 연명치료 중단의 정당성에 기초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인간 품위를 지니는 좋은 죽음과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사전의료의향서를 정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노력은 임종 결정에서 인간 품위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인륜성을 위한 의미 있는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이익 집단 간의 대화와 논의, 문제점 분석과 검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세부 사항을 법으로 제정하고, 싸나톨로지스트(죽음교육전문가, 임종설계사)를 양성해야 우리 국민의 죽음의 질 지수(세계 18위)를 높이고 삶의 지수(세계 47위)와 행복 지수(세계 58위) 순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싸나토로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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