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문다. 해마다 연말이면 늘 한 해를 돌아보게 되지만 올 한 해는 유난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한 해가 저무는 것만이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이어진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 날마다 새로운 의혹이 터져 나오는 박근혜, 최순실 사태는 부정과 부패, 온갖 탈법과 위법으로 얼룩졌던 한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확실한 신호다. 현실이 허구적, 예술적 상상력을 뛰어넘어 버린 상황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풍자와 패러디의 형식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층부의 공식적 권위와 말들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웃음 섞인 하층의 여러 형식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냈다. '내가 이러려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말하기 글쓰기를 배웠나'고 하던 한 초등학생의 말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엄중한 상황을 사람들은 한바탕 신명 나는 해학과 축제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최순실, 박근혜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그랬다. 한 편의 꼭두각시 인형극이었다. 검은 장막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한 편의 인형극임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인형극의 보조자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꼭두각시의 영혼 없는 몸짓에 웃고 우는 무지한 바보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인형을 조종하는 가느다란 실이 점점 사람들의 눈에 뜨이기 시작했음을.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형을 조종하는 실 따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말 무지한 쪽은, 인형을 조종하는 실들과 장막 뒤의 존재가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그들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사실은 관객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그들만 몰랐다.
사람들은 인형에 연결된 실들을 잘라 버렸고 검은 장막을 걷어 버렸다. 속임수와 허위로 가득 찬 극장을 사람들은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자 또 다른 사실들이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믿었던 국가라는 시스템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극적으로 폭로되었다. 스스로 국민이라 믿었던 자신들이 사실은 국가의 외부로 내몰린 난민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음도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알아버렸다. 서경식은 '국민'이란 국가에 의해 시민권을 보장받는 존재이며 인권이나 생존권도 국가와의 관계에서 규정된다는 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약속이라 지적한다. 그 시민권과 인권, 생존권까지 그동안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8년 발표된 '무너진 극장'이라는 단편에서 박태순은 1960년 4월 25과 26일 풍경을 이야기한다. 4월 25일, 부정 선거와 오도된 민주주의를 규탄하다 죽어버린 친구의 묘지를 찾고 함께 시위하던 친구를 찾아 서울대 병원을 찾아갔던 '우리'는 마침내 대표적 정치 깡패 임화수가 경영하던 '평화극장'으로 간다. 사람들은 출입구를 부수고 스크린을 찢었으며 급기야 극장에 불까지 질러 버렸다. 군인들을 피해 숨어 있던 '나'는 이승만이 하야하던 4월 26일 새벽 극장을 나온다.
그 새벽을 박태순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새날의 출발은 비참한 상처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번창했던 극장은 여지없이 망가져 버리고, 그 파괴된 폐허에서 새날은 우뚝 그 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략- 파괴된 극장과 함께 과거의 시간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지난 10년의 시간이 파괴당했다. 과거의 극장은 부서져 버렸으나 과연 새로운 극장, 새로운 무대는 어떻게나 등장하려는 것인가?"
그렇다. 사람들은 허위와 속임수로 가득 찬 극장을 무너뜨린 것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무너진 극장'을 대신할 새로운 극장을 꿈꾸고 있다. 폐쇄되고 엄습한 극장이 아니라 밝은 빛으로 가득 찬 거대하고 새로운 극장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
새로운 극장이 어떤 모습일지 아직은 정확히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새로운 극장의 주인은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극장은 적어도 빛이 어둠을 이기고 참이 거짓을 이기며 진실이 더는 침몰하지 않는 극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새로운 극장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산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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