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서 낭만과 의리 따위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 두 단어는 정치권의 박제된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정치권력의 끈이 떨어지는 순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들에게 낭만과 의리는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는다. 크든 작든 권력자라는 신분을 유지해야 존재가치를 느끼는 정치인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단어다.

지난 9일 1막의 무대를 접은 대통령 탄핵 정국의 뒤끝에 나타난 국회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탄핵안 가결 이후 치밀하게 계산된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주력한 느낌이다.

탄핵정국을 주도했던 야권 인사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환호하지 않고 차분하고 덤덤하게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엄중한 상황을 손뼉을 치면서 마냥 기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모습을 국민 앞에 보여주자는 야당 내부 방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권 인사들은 시종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주군'의 몰락 앞에 울분을 토하거나 분통을 터트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대통령의 한 핵심 인사는 탄핵안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본회장을 떠나는 것으로 그나마 의리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또한 후일을 도모하는 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을까.

대통령 탄핵 정국의 2막 무대는 훨씬 복잡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다. 여야 정치권의 본격적인 싸움판이 이번 무대에서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려는 여야의 수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사전에는 이 점입가경을 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숨은 뜻도 있다.

지금은 집권당 이미지에 집착할 여력이 없는 여권은 당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현 정권의 몰락에 큰 역할을 한 일부 적폐 인사를 배제한 당 재건 형태든, 발전적인 재창당이 되든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이름을 단 정당 출현은 시간문제다. 여당 국회의원들은 개개인의 권력 유지에 유리한 형태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쉽지 않은 머리싸움이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대통령 탄핵'이라는 대사건은 관심 밖의 사안일 수 있다. 대통령과 연계된 세력별 당 쪼개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서로 당에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들 모두는 개헌을 통하든 시간을 벌든 확실한 대선 후보를 만들어내 또다시 집권당 소속을 꿈꾸는 게다.

현재는 대선 후보가 넘쳐난다는 야권에서는 정당 간은 물론 같은 당 내부의 후보별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대선 시기의 유불리를 놓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안 인용 시점과 심리방법을 주문하기 바쁘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정권 교체 기회를 저마다 권력 확보에 용이한 발판으로 활용하고자 자기 선호 대선 후보를 위한 행동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 정치역사를 바꿀 개헌 문제를 놓고도 제각각의 해법을 내놓고 있다. 야권도 '그들끼리'의 진영 싸움을 거창하게 벌인다는 국민적 눈총을 받는 모양새다. 야당에서 집권당 소속을 꿈꾸는 그들의 움직임을 탓할 수야 없지만, 볼썽사납다는 인상이 든다. 이를 의식했는지 혼란에 빠진 국정의 한 축을 맡아 책임지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은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라는 불안한 국정 요인을 고려해 여·야·정협의체를 구성하겠다는 등 국민을 의식하는 행보를 보이지만, 여야 정파별 생각이 제각각이어서 성과는커녕 일말의 기대감을 던지는 시선도 찾아보기 어렵다.

셈법만 난무하는 저 판을 바라보는 국민은 정치권력 세력들의 목불인견을 또 봐 줘야하느냐는 심정이다. 사전에는 목불인견을 '눈앞에 벌어진 상황 따위를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촛불 민심의 거대한 바람이 연 이번 무대에서 정치권력들은 배역 싸움을 위한 얄팍한 이미지 연출을 벌이면서 제 잇속만 챙기겠다는 심산이다. 권력 쟁취를 위해 '대립과 갈등', '패권과 당리당략'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는 정치판의 낭만과 의리가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어차피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은 잠시 힘이 있으니까.

탄핵 정국의 3막 무대는 결국 국민이 장식할 수밖에 없다. 촛불 민심의 메시지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제왕적 권력 구도'와 '대립·패권의 후진적 정치시스템'을 일소하고, 누구나 능력껏 제대로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으로 함축된다. 이 역사적인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실행하는 게 정치적인 낭만이고 국민적인 의리다. 민심은 이런 낭만과 의리를 아는 정치권력을 탄핵 정국의 무대 뒤를 이어갈 주연배우로 선택할 태세다. 수많은 후보가 주연배우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모양인데, 착각하지 말라. 일단 성에 차는 주연배우감을 못 찾고 있는 민심부터 읽어라.

편집국 부국장 겸 뉴미디어본부장 choonj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