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상영관에서 보고 나오면서 결심했다.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알려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다짐을 실천할 수 있는 기간은 너무 짧았다. 지난 9월 28일 개봉한 이 영화는 그리 오랜 기간 상영하지 않고 막을 내렸다.
2009년 1월 15일 미국 유에스 항공 소속 1549편 여객기는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이륙하자마자 새 떼와 충돌했다. 여객기는 순식간에 비행 불능 상태에 빠진다. 오후 3시27분11초 상황이다. 비행기의 기장은 체슬리 설렌버거, 애칭은 설리(Sully)다.
갑자기 닥친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설리 기장과 제프 스카일스 부기장은 오만 가지 치명적 위험과 실낱같은 위기 탈출 가능성을 모조리 탐색하고 승객을 살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설리는 다른 공항에 비상착륙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결론짓고, 뉴욕 도심의 허드슨 강에 불시착하기로 결정한다. 오후 3시30분43초, 여객기는 영상 2도의 차가운 강물 위에 꽂히듯 착수했다. 탑승자 155명 전원 생존. '허드슨 강의 기적'이었다.
이 실화를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는 영화로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보수주의자이다. 한국에서는 단서가 붙어 '보수다운 보수' '멋진 보수' '건전한 보수'로 통한다. 그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내게 멋진 보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멋진 영화로 다가왔다.
몇몇 평론가가 이미 언급했듯, 이 영화에는 화려한 구출 장면이나 멋있는 액션이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조용하고 심심할 지경이다. 모두 지켜야 할 사항을 지키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설리는 관제탑과 교신하면서 침착하게 상황을 살핀다. 뭔가 기발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승무원들은 규정대로 승객을 안내할 뿐이다. 카메라는 그런 설리의 손을 가끔 비춘다. 수십 년 비행 경력이 몸속에 차곡차곡 쌓인 설리의 '지킬 것은 지키는' 손을 감독은 보여준다.
심지어 차가운 강물 위에 내린 여객기에서 승객들이 빠져나가는 장면조차 심심하다. 사람들은 규정대로 차례차례 밖으로 나갈 뿐이다. 이 탈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울어버렸다. "세월호 참사 때도 저렇게 규정대로 차근차근 대처했다면 우리 아이들은 살았을 것 아닌가?"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설리가 있었다. 사고 이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틈만 나면 아내와 통화하며 가족을 챙기는 설리는 내게 멋진 보수주의로 다가왔다. 지킬 것은 지키는 것, 그런 태도와 가치관으로 지혜와 희망을 길어 올리겠다는 것이 보수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 현장을 취재하면서 "국민의 힘은 참 대단하다"고 내내 느끼면서도 줄곧 설리를 떠올렸다. "왜 보수를 자처하는 우리 정부의 현재 지도자들은 '지킬 것은 지키기에서 오는 감동'을 국민에게 주지 못하고 국정농단의 산사태에 파묻혀 버렸나?" "'설리…'을 꼭 보시라고 권할걸." 한국의 주류 야당은 그 이념이 보수에 속하므로 이런 심사는 비단 여권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소설이 채만식의 '태평천하'였다. 1930년대 중일전쟁이 터져 식민지 조선의 백성은 갈수록 삶이 힘겨워지고 분통이 터지는데 "우리만 빼고 다 망해라"고 외치며 홀로 호의호식하고, 재산을 끌어모으며, 가난한 백성을 골탕 먹이는 윤직원 영감이 '태평천하'의 주인공이다. 풍자소설로 유명한 '태평천하'에서 가장 빛나는 풍자 대목은 '절약의 도락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단원이다.
윤직원 영감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는 대복이는 오로지 돈을 아끼는 행위 자체에서만 쾌락을 느낀다. 깨끗한 돈이든 더러운 돈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윤직원 영감이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관계없다. 돈을 아끼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서만 기쁨을 찾을 뿐이다. 절약 자체가 도락이 된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중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민족의 이익이 아닌 사익을 취한 이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중요한 자리에 있던 적잖은 정치지도자는 국정이 이렇게 파탄 나기까지 이런 '절약의 도락'과 비슷한 정신 태세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촛불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많은 사람이 국민의 힘에 주목했다. 이제는 바른 지도자, 멋진 리더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설리와 대복이 사이에 서 있는 게 아닐까.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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