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안은 가결됐다. 촛불은 이겼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다. 사람들은 지난 주말 거리로 나와 축제를 벌였다. 그런데 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무엇이 바뀌었나. 원래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타의로 혼자 있게 된 것 말고는 뭐가 달라졌나. 대통령은 직무만 정지되었을 뿐 여전히 청와대를 지키고 있다. 즉각 내려오라는 국민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관저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대통령이 임명한 황교안 총리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대통령권한대행으로 헌재 결정이 날 때까지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중요한 국정을 처리한다. 경제부총리 사회부총리를 비롯한 내각도 그대로다. 청와대와 갈등 끝에 사직한 법무부 장관 자리만 비어있다. 정치권에서 온몸으로 대통령을 방어했던 친박근혜계도 아직은 새누리당의 주류다.

대통령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탄핵 후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한 발언을 보면 탄핵 기각과 직무 복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는 끝까지 내려올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니 내려올 수가 없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순간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의 수사를 받아야 하니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을 터. 지금 이 시각에도 구중심처에서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이는 탄핵 직후 직무가 정지되기 직전 대통령으로 행한 마지막 업무를 봐도 추측할 수 있다. 최재경 민정수석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조대환 변호사를 임명한 '막장인사'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조대환 새 수석은 세월호 진상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여당 추천 부위원장을 맡아 특조위 활동 중단을 요구했던 인물. 특조위를 '세금 도둑'으로 몰며 진상조사를 방해한 훼방꾼이다. 이런 사람을 민정수석에 앉힌 이유가 뭐겠는가. 누가 봐도 특검 수사와 헌재 심판 대상이 된 '세월호 7시간'에 대비하기 위한 게 분명하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지독히도 관운 좋은 황교안 권한대행은 말할 것도 없고, 박한철 헌법재판소장도 '박근혜 사람'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했고 박 대통령이 헌재소장에 기용했다. 황교안과 박한철, 조대환 이들 셋은 사법연수원 13기로 동기이다. 성향이 비슷한 이들이 엉뚱한 마음을 먹는다면 국민의 뜻과는 다른 탄핵 심판 결과를 내놓을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최순실에게 80억 원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의 법무팀장 김상균 변호사도 연수원 13기라는 점이다. 최순실의 80억 원은 대통령 범죄행위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청와대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헌재의 심판에 대비하는데 야당의 대응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야당의 헛발질을 떠올리면 걱정스럽기만 하다. 야권 분열을 노린 정권의 이간질에 번번이 당했다. 제1야당의 추미애 대표는 홀로 영수회담을 덥석 받아 분열을 자초하더니, 새누리당 비대위 김무성 의원과의 독대에서 '1월 퇴진'이라는 뜬금포 발언으로 전열을 흐트리며 국민을 실망하게 했다. 국민의당도 도긴개긴이다. 탄핵 과정에서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이다가 호된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청와대가 담화를 발표할 때마다 정치권은 출렁거렸고 '진퇴를 국회 결정에 따르겠다'는 대통령의 꼼수 한마디에 야 3당은 허둥대며 한 방에 허물어지는 듯한 모습도 보여줬다. 탄핵안 이후엔 '즉각 퇴진'이라는 말조차 쑥 들어갔다. '포스트 탄핵' 구상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벚꽃대선이니 폭염대선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대선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이런 어수선한 틈을 타 청와대의 암중모색은 계속될 것이다. '히키코모리' 대통령이 관저에서 혼밥하며 TV드라마나 실컷 볼 것이라고 비웃을 시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촛불승리에 취해 서로의 이익만 따지다가 진흙탕 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럴 경우 국민 분노의 타깃은 야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과 개헌론자들은 이참에 개헌론 확산도 꾀할 것이고 정국은 아수라장이 될 터. 이는 청와대의 노림수에 말려드는 꼴이다.

야권은 꿈에서 깨야 한다. 국민의 95%가 박 대통령에 반대하지만 그들 모두가 야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이 지지율 30%를 넘은 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마저도 '촛불효과' 아니던가. 야권은 여야정 협의체를 제안하는 등 국정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 임시국회 소집도 요구하며 공조를 과시한다. 두고 볼 일이다. 야당은 국민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헌재 역시 정치적 기관이라 국민의 압력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탄핵안은 가결됐다. 압도적인 결과에도 기쁨은 잠시, 다시 마음은 무겁다. 국민의 자존심은 다시 세웠지만 자괴감은 치유되지 않았다. 촛불승리에 취해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로 시작된 싸움이 더욱 험난할 수 있다.

편집국부국장 dol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