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하루가 마치 한 달이나 일 년, 아니 그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지난주 토요일이 내겐 그런 날이었다. 오전에는 고모의 49재가 있었고, 저녁에는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바라는 서면 촛불집회에 갈 예정이었다. 49재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영도다리를 건넜다.

고모는 병석에 눕기 전까지 떡방앗간을 운영하신 억척스러운 여장부였다. 당신의 6남매뿐 아니라 조카들에게도 인정스러운 고모였지만, 교육에는 무관심했다. 고모는 내가 중3 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는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네 처지에 무슨 인문계고. 대학 갈 형편도 안 되면서."

나는 고모 말에 기가 팍 죽어서 실업계로 진학했다. 잠깐이지만 그 일로 고모를 미워했다. 촛불을 밝힌 불단을 향해 노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절을 하고, 한글로 번역된 불경을 외우면서 고모의 왕생극락을 빌었다. 그 마음에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소각장에서 고인의 옷을 태우는 소대 의례를 보면서 어쩌면 삶이란 고인의 옷이 타는 동안만큼이나 짧고 투명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구에서 온 남동생이랑 절을 벗어나 감지 해변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내려다본 초겨울 바다가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촛불집회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가는 길에 동생과 고향 마을인 대평동에 들러보았다. 나이 들어서 동생과 함께 고향 마을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를 대놓고, 어릴 때처럼 동생의 손을 잡고 대평동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옛 기억이 하나씩 딸려 나왔다.

국민교육헌장을 외느라 쪽지에 적어서 다니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았던 기억. 대통령이 온다고 한 달 내내 카드섹션 연습을 하느라 햇빛에 얼굴이 발갛게 익어서 콧등에 주근깨가 도도록하게 진해졌던 기억. 제3부두로 파월장병 환송식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었던 기억.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내게 대통령은 박정희 단 한 사람이었다. 누구는 박정희를 대통령이란 이름의 고유명사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유신은 우리의 청춘을 지배했다. 내가 고향 마을을 떠난 것이 10·26이 있던 직전 해였으니 박정희와 고향 마을의 추억은 어쩔 수 없이 겹칠 수밖에 없다. 개구쟁이였던 동생의 기억은 엉뚱하기 짝이 없다. 어느 태풍이 몰아치던 날,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야기였다.

바다에 빠진 공을 건지러 무작정 파도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단다. 그 순간 솟구쳐오른 파도 끝에 몸이 붕 떠올랐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도로 육지로 떨어졌다고. 킥킥 웃다 보니 까딱하면 죽을 뻔한 이야기였다.

오후 늦게서야 혼자 서면으로 갔다. 데모하러 가자던 동료작가 K도 어디엔가 와있을 터였다. 광장에는 대통령의 3차 담화에 분노한 촛불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쥬디스 태화 앞 본부석을 등지고 떠밀리듯이 걷는데 묘한 감동이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고등학교 선배 P 부부였다. 몇 년 전, 용산참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보러갔을 때도 P 부부를 극장에서 딱 마주쳤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불교학생회에 다녔다. 경전을 펜글씨로 필사하던 신심과 함께 치열했던 사춘기적 방황과 불안과 갈증을 공유한 사이였다. 나는 선배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한참을 더 떠밀려가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앉고 보니 발밑이 하수구였다. 냄새가 심했다. 한 시민이 냄새가 올라오지 못하게 신문지를 몇 장 덮어주었다. 한결 나았다.

공식행사가 진행되는 중에 K와 연락이 닿아 동료작가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곧 문현동 교차로까지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록그룹 들국화가 부른 '행진'이라는 곡을 '퇴진'으로 개사한 노래를 우리는 목청껏 소리 높여 불렀다.

"퇴진, 퇴진, 퇴진하는 거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야 하야 하야 하야하여라. 박근혜는 하야하여라."

노랫말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어쩌면 아비에 이어 그 딸까지 국민들 손에 끌려 내려오게 될 셰익스피어도 울고 갈 이 비극이라니.

시위 현장은 마치 퇴진 콘서트장 같았다. '대통령 즉각 퇴진'과 '새누리당 해체'를 외치는 집회에는 이제 최루탄도, 물대포도, 스크럼도, 연행도 없었다. 집회가 끝나고 경찰들에게 시민들이 되레 박수를 보내는 그야말로 평화적인 집회였다. 이제 더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지도자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다짐. 우리가 모두 방관하고 침묵해온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시간이었다. 집회가 끝나고도 우리는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드물게 길고 긴 하루였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