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나라에 '연좌제'라는 유령이 기승을 부린 적이 있다.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이 제도는 전근대적인 법률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4년 갑오개혁 때 "죄인 본인 외 연좌 형률 일절 금지"라는 칙령이 선포됨으로써 사실상 폐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방 후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연좌제는 끈질긴 생명을 유지했다. 특히 정통성이 없는 정권들은 반공을 빌미로 수많은 국민에게 불이익을 줬다.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공직 진출이나 사관학교 진학 등이 좌절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른바 '신원조회'에서 꼬투리가 잡히면 개인의 미래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부작용이 커지자 정부는 1981년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다.

조선시대에는 연좌제가 더 엄격하게 적용됐다. 나라에 반역을 하거나 왕에게 불충한 행동을 했다가는 일가친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가문을 뿌리째 없애버린다는 '멸문(滅門)'이나 '멸족(滅族)'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형벌이었다. 멸족보다 좀 낮은 단계는 '폐족(廢族)'이다.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목숨은 부지한다지만 폐족 역시 당시 양반가에게는 씻기 힘든 치욕이었다.

왕조시대에나 쓰이던 폐족이라는 용어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이는 안희정 충남지사다. 2007년 대선 패배 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 폐족임을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일부 보수권에서는 친노무현계를 비판할 때 '노빠 폐족'이란 말을 사용했다.

9일 국회에서 이뤄질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이번에는 새누리당에서 폐족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만약 탄핵안이 가결된다면 시종일관 탄핵에 반대해 온 친박근혜계 세력이 하루아침에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더 나아가 친박 세력이 폐족이 아니라 아예 멸족될 거라는 예상도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새누리당 친박계 세력의 자업자득이다.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민심이 불꽃처럼 타오르는데도 한 줌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를 애써 외면한 대가이기도 하다. 지금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국민 누구도 친박계 세력의 폐족이나 멸문을 동정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서다.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