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대통령이라 부르기도 수치스럽다' '담화하는 날은 기름 붓는 날인가' '국민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전율을 느낀다' '본인이 잘못해 놓고 왜 국회에 공을 넘기나,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더는 기대할 게 없으니 탄핵으로 몰아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가 있었던 지난달 29일 저녁, 라디오 생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격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부산 등 각지에서 전화를 건 이들은 하나같이 성난 목소리였다. 한 시민은 "이건 국민들을 호구로 보는 것이다. 이젠 국민들이 이긴다는 걸 보여주자. 더 많은 촛불을 들어서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고 공평한 세상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자 메시지도 곳곳에서 쇄도했다. '국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들고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나' '오늘 담화대로 하면 대통령이 하야할 이유도, 탄핵을 당할 이유도 없네요. 그러니 어느 국민이 이해하겠나' '광화문에 300만 명이 모여야 정신 차리려나' '대통령을 지지했던 대구시민으로서 사죄를 드리고 공범으로 회개한다' '적전분열을 노린 비열한 담화' '박근혜의 꼼수, 시간벌기' 등등.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헌법유린 행위 등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세 차례나 대국민 담화를 했지만, 민심의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담화 때마다 불을 더 지르는 형국이다. 피의자로 전락한 박 대통령이 아직도 책임을 회피하며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최순실-안종범-정호성 등과 '공동정범', '공모'로 적시됐는데도 검찰 조사를 '사상누각'으로 치부하고 주변 사람 관리를 잘못한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검찰 조사에 응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않았나.

현직 국가원수로 거짓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사례 중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있다. 그는 1998년 백악관 인턴직원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과 관련해 위증 혐의로 탄핵 소추까지 당했다. 클린턴은 법정에서 성관계를 부인하고, 거짓 증언을 교사했다가 사실이 드러나자 잘못을 시인했다. 애초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미국의 위신이 수렁에 빠졌지만, 특검팀은 르윈스키의 옷에 묻은 대통령의 정액을 기어코 찾아냈다. 백악관을 비밀리에 방문해 클린턴의 혈액을 채취하기까지 했다. 특검 수사가 사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겪은 치욕과 조롱은 끔찍했다. 그러나 치욕의 사실을 사실대로 정립함으로써 치욕을 씻어내고 사태를 수습하는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전체적으로 완전하더라도 구멍 하나가 새면 이것은 깨진 옹기그릇일 뿐이다. 백 마디가 신뢰할 만 해도 한마디의 거짓이 있다면 그것은 도깨비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권력층에는 거짓이 판을 친다. '왕수석'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은 그 동안 '최순실을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고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구속된 차은택 씨 등의 증언이 나온 이후에야 '대통령 지시' 운운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자세를 보였다. 박 대통령 또한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떤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최 씨 및 측근들과 공모해 비리에 가담했다고 의심받을 만한 증거와 정황들이 검찰 조사에서 줄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니 국민들이 분개하는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출마 연설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국민행복의 길과 새로운 신뢰사회를 열어가겠습니다. 부정부패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투명한 정부를 통해 가장 깨끗한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마음 속에 꿈을 심는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신뢰는 지금 불신과 분노로 변했고 국민들의 꿈은 악몽으로 바뀐 것 같다. 법치 수준도 뒷걸음질쳤다.

미국 닉슨이 워터게이트(상대 민주당 캠프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사건과 잇딴 거짓말로 대통령 임기 중 물러났지만, 박 대통령은 그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에 대한 의혹과 혐의는 대기업 강제모금을 비롯해 국정 전반에 걸쳐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권력형 비리는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거짓과 은폐에 가려지거나 묻혀 있는 사실과 진실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의 비위 의혹과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칠 박영수 특검팀은 책임이 막중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7시간 행적뿐 아니라 그동안 제기된 각종 비리 혐의를 명명백백하게 규명할 임무를 짊어졌다. 우리나라를 패닉 상태로 빠뜨린 거대 비리에 대한 수사는 대통령 퇴진이나 탄핵 등의 정국 상황과는 별개로 계속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특검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해 그 실상을 주권자들 앞에 내놓아야 한다. 박 특검의 말처럼 국민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그 뜻에 부응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이다.

편집국 선임기자 겸 (사)걷고싶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