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간단한 대화에서부터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까지 다양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끔씩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에 부딪치는 수가 많다. 말수가 아주 적거나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다. 드물게는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인터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떻게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야 하기에 이럴 때는 속이 바짝바짝 타기 마련이다.

대중문화를 담당하던 때 유독 이런 일이 많았다. 나이가 비교적 어린 연예인들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장황한 질문을 던져 단답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식이었다. 예컨대 "이번에 출연하는 드라마에서는 청순한 여대생 연기를 이런저런 식으로 할거죠"라고 물으면 "예"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신문에 실리는 기사에서는 이런 각오가 해당 연예인이 직접 한 말로 인용됐다. 궁여지책이었다. 눌변이었던 몇몇 연예인이 몇 년 뒤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것을 봤다. 경륜은 초기의 미숙함을 없애는 최고의 무기임이 분명하다.

꽤 오래전에 있었던 연예인들과의 기억이 떠오른 건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 담화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세 차례의 국민 담화에서 단 한 번도 기자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 1차 담화는 아예 녹화였으니 질문이 불가능했다. 3차 담화에서는 참다 못한 몇몇 기자가 기습전을 펼쳤다. "최순실과의 공범관계를 인정하느냐"는 등의 돌발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박 대통령의 답변은 없었다. 이전의 담화보다 나아졌다면 "나중에 소상히 이야기하겠다"는 말이라도 끌어냈다는 것뿐이다.

박 대통령은 왜 질문을 받지 않았을까. 선천적으로 말솜씨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너무 노회해서였을까. 전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후자라면 국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금 국민들이 알고 싶어하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질문을 한 기자와 마찬가지로 이런 장면을 본 이들도 참담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을 터다.

박 대통령은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다. 꼭 필요한 말만 한다. 그게 한때는 매력으로 여겨졌다. "참 나쁜 대통령"에서부터 "대전은요?" 등은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수세이던 형국을 한 번에 뒤집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칼이다. 단답형 화법은 겉만 번지르르한 달변가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유권자들에게 튼실한 믿음을 주는 게 사실이다. 반대로 단답이 지나치면 폐쇄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거나 모르는 걸 숨기기 위한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불행하게도 박 대통령의 어법에는 단답형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면만 담겨졌다는 사실이 최근 터진 일련의 사태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백번 양보해 여기까지는 다 좋다. 아주 껄끄러운 질문이야 피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박 대통령은 3차 담화에서 다시 한 번 국민의 가슴을 후벼팠다. 4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주저리주저리 변명만 늘어놨다. 도대체 그동안 한 3번의 담화가 서로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으로 바뀌었을 뿐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정권 이양 절차를 정해주면 이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이른바 '백지위임'은 또 뭔가. 스스로 결정하면 될 문제를 제3자에게 떠넘겨 정국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의 노림수는 얼핏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핵을 둘러싸고 야권 공조가 분열될 조짐이 나타나고 새누리당의 비박근혜계마저 흔들리고 있어서다. 최순실 씨와 '문고리 3인방'까지 떠나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박 대통령에게 누가 이처럼 기막힌 전략을 조언했는지는 의문이나 '절묘한 한 수'가 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박 대통령과 측근들은 뒤에서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면 임기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안도의 한숨을 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가슴은 이 순간에도 시퍼렇게 멍들고 있다. 박 대통령은 3차 담화 때 "국민들의 그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린다"고 했다. 어림없는 소리다. 알고는 계시는가. 우리 가슴은 대통령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