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우리 당에 표를 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2004년 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아 방송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했던 발언이다. 총선을 두 달 가까이 앞둔 상황에서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 한마디로 노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다.
그해 3월 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며 3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문제의 발언이 선거법을 위반해 국법을 문란케 했다는 것. 야당이 봐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던지 측근 비리 등 부정부패에다 경제와 국정 파탄을 덧붙였다. 측근 비리 등 부정부패라고 해봐야 안희정 씨 등의 불법 대선자금 80억 원 수수 의혹과 노건평 씨의 3000만 원 수수 의혹 등으로 대통령 본인과는 무관했다. 무엇보다 경제와 국정 파탄은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해당될 정도로 억지춘향이었다.
가장 문제라는 선거중립 의무 위반으로 치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차고도 넘친다. "북한 핵문제와 대내외적인 경제여건 악화를 비롯해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민생 안정과 경제활성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회가 탄생해야 한다." 올해 총선을 하루 앞둔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총선 한 달 전에는 친박 실세들 지원을 위해 노골적으로 대구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처럼 특정 후보나 정당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선거 때마다 개입 논란을 야기했다. 박 대통령이 이토록 대놓고 선거에 개입한 것은 '노무현 탄핵 학습 효과'가 컸을 법하다. 자신들이 비록 탄핵 사유로 들었지만 헌재에서 가결되기는 가당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12년 만에 재현된 탄핵 부메랑이 겨누는 칼날은 대통령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 따위가 아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사유의 곁가지였던 측근 비리 등 부정부패, 경제와 국정 파탄이 주요 내용이다. 게다가 단순히 측근 비리를 넘어 박 대통령이 비리의 당사자로 피의자 신세가 됐다. 굳이 국법 문란이나 국정 파탄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탄핵 사유가 차고 넘치는 것이다.
12년 전과 또 다른 점이라면 입장이 뒤바뀐 대통령과 야당이다. 청와대와 친박은 "할 테면 해 보라"며 탄핵을 되레 부추겼다. 야당은 당시와 같은 역풍을 우려하며 머뭇거렸다. 여기에도 '노무현 탄핵 학습효과'는 위력을 발휘했다. 어쨌든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는 기정사실이 됐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국회와 헌법재판소라는 두 관문만 남은 셈이다.
이제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청와대로서도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대통령의 권위와 명예는 더 떨어질 곳도 없다. 가진 것은 시간뿐이다. 4%의 지지율 따위는 일시적 현상이다. 탄핵이 넘어야 할 난관은 많고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국회와 헌재에서 탄핵이 가결돼도 역풍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손은 어디선가 분주히 이런 다양한 정치공학적 셈법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착각은 자유다. 청와대는 노무현 탄핵에서 제 보고 싶은 것만 배웠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는 미망에 빠져 있다. 노무현 탄핵이 왜 실패로 끝났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탄핵안의 국회 통과 뒤 불어닥친 역풍만 보일 뿐이다. 당시 선거중립 위반이라는 이유만으로 탄핵을 밀어붙인 것부터 민심과 동떨어진 억지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아니, 정확히는 잊고 싶을 것이다.
하긴 청와대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인 역풍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권은 탄핵 표결 정족수 계산으로 분주하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는다면 더 문제다. 성난 촛불 민심은 정치권을 향한 역풍으로 거세게 옮겨붙을 것이다. 헌재 부결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 청와대로서야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12년 전과 많이 다르다. 이럴 경우 촛불 민심은 대통령은 물론 국회와 사법부 등 국가권력 전체를 부정하는 역풍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일말의 헛된 꿈을 안고 시간과의 싸움에 들어갔으니 어쩔 도리야 없다. 그들이 좋아한 '세월호 피로감' 같은 '촛불 피로감'도 머지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과연 바람이 세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촛불이 사그라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정 뜻이 그렇다니 이제 국민들도 질기고 집요하게 촛불을 이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바람 앞의 촛불 신세는 박 대통령과 한 줌의 친박 무리일 뿐이다. 그들만이 이를 모른 채 엉뚱한 역풍이나 꿈꾸고 있다는 게 지금 우리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논설위원 jj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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