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수도권 일대에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던 적이 있다. 민방위본부는 훈련이 아닌 실제상황이라는 긴급 방송을 내보냈다. 전쟁의 기억이 남아있던 터라 다들 많이 놀라고 불안해했다. 북한 조종사가 귀순한 것으로 밝혀졌고 일상은 평온을 되찾았다. 당시만 해도 국민이 순박해서 위기에 즉각 반응했다. 지도층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그 힘으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 나라 전체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주말이면 광화문광장에 수많은 군중이 각자 불만을 가슴에 품고 모여든다. 분노의 대상은 명확한데 그 사연은 백만 가지이다. 한계 생활자들은 생업에 바빠 시위에 참가할 여유마저 없다. 같은 시간대 포털의 상위 검색어는 로또 추첨이다. 탈출구가 없어 확률이 낮은 희망에 기대는 듯하다. 지도자에게 화살을 돌린다고 해서 풀어질 응어리들이 아니다.

위기가 진행 중인데 경보를 울려야 할 당사자들이 숨어서 방관하고 있다. 지도층은 남 탓을 할 뿐 무능력과 무책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반복되는 위기에 지치고 속아서인지 다들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번 위기에 무너지면 국가발전이 상당 기간 후퇴하게 된다. 그 폐해는 힘없는 서민, 잘못 없는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는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고 했다. 위기 원인을 살펴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위 이슈는 국정 농단이지만 배경에는 양극화에 따른 증오가 자리하고 있다. 근본 원인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초가 너무 허술한 것이다. 기초를 다지지 않은 채 빨리 달렸고 멀리 왔고 덩치를 키웠다. 어차피 겪을 고통이라면 기초를 새롭게 다져 위기 이후를 기약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라 하겠다.

마라톤은 경기 전에 느리게 오래 뛰는 훈련을 한다. 느리게 오래 뛰는 것을 쌓아서 완주를 하고 기록을 단축한다. 나이테로 굵어진 줄기가 받쳐주어 나무가 높이 자라듯이. 국가도 기초를 다지며 느리게 오래 발전해서 선진국에 진입한다. 고민, 소통, 희생, 겸손, 인내, 근성, 의지 등이 수반되어야 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의 기초는 경제, 정치, 사회의 셋이다. 경제는 자립하고 정치는 책임지고 사회는 화합해야 한다. 다리 셋의 솥과 같아 하나라도 약하거나 길이가 안 맞으면 넘어진다. 부단히 수선·개조하고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충격에 흔들리면 중심을 붙들고서 복원력을 작동시켜야 한다. 지금 세 다리가 모두 부러지기 직전이다. 그래서 총체적 위기, 실제 상황이다.

경제는 자립,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근로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 의무이다.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하고 일을 해도 살기 어려우니 근로는 의무가 아닌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기업은 고용과 이익의 조화를 추구하고 정부는 일자리를 최대한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사업을 벌여야 한다. 일하지 않고 버는 소득,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과감하게 환수·환류하는 조치도 필요하다.

정치는 책임, 자릿값을 해야 한다. 공직은 민생을 살피라며 책임을 맡긴 자리이다. 부를 멀리하고 권력과 명예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유능하면서 품성을 갖춘 인재들을 발탁해야 한다. 국민이 깨어있고 감시를 해야 정치가 나태해지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국민이 소통·참여하는 민주화의 기반 위에서 산업화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사회는 화합, 신뢰로 모순과 갈등을 풀어야 한다. 기득권층이 솔선·희생하고 종교계와 지식인이 화합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화합을 위한 경제, 화합에 의한 정치를 시도할 만하다. 노사안정, 규제개혁, 생산적 복지, 지역 동반발전 등에서 획기적 진전이 있으면 경제는 수 % 포인트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다. 정치는 정파 간 정책경쟁을 벌여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게 된다.

이번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부산의 운명이 걸려 있다. 부산은 기초 셋 중 경제가 가장 취약하다. 경제를 살려야 도시가 활력을 되찾고 인구감소 추세가 멈춘다. 인천은 인구가 계속 늘어 최근 3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대로 가면 부산은 10년 후 3위 도시로 전락한다. 백 년 만에 순위가 낮아져 시민들이 자괴감을 느껴야만 하는가.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기초를 다지면서 위기의 세월을 견뎌내야겠다. 실질적인 장기과제에 착수해서 위기 이후의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 국제영화제 브랜드를 하나 키우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바른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