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왔을 때 지리산 쌍계사를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틈이 벌어지고 틀어질 대로 틀어진 육중한 기둥 하나가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바위는 제 생긴 모양 그대로 울퉁불퉁하고 기둥은 그 울퉁불퉁한 바위의 요철 위에 얼기설기 이가 맞는 듯 맞지 않은 듯 앉아 있었다.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미닫이문을 닫으면 바람 들어 오는 틈 하나 없이 이가 딱 맞아 떨어지는 공간에서 7년을 살아온 나에게 그날의 충격은 대단했다.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기둥. 그리고 그 기둥과 바위의 사이의 여백. 그리고 그 여백 사이로 흐르는 여유. 그러나 손톱 하나 들어가지 않는 이종 물체 간의 숨 막히는 밀도.
손을 대면 더 댈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더는 손을 댈 수 없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밀도와 여유에서 나는 숨이 막혀 버렸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 사건 이후 여닫이문의 벌어진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문풍지 같은 것들의 여유와 밀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여유와 밀도의 차이라고 나름대로 이해를 굳히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여유와 밀도가 반반 정도로 상존하고 일본은 밀도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밀도가 여유를 잠식하면 답답하나 정교하다. 여유가 밀도를 침범하면 호방하지만 자칫 무질서해지기 쉽다.
며칠 전 교토의 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에서 고려 불화를 보았다. 천옥박고관의 고려 불화 전시 제목과 부제는 '고려불화-향기로운 장식미'였다. 두 개의 문을 밀고 들어선 전시장 안의 고려 불화는 유리로 막혀 있었다. 유리에서 불화까지는 거리는 1m가 조금 넘을까? 그렇게 거리를 유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웠다. 고려 불화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크게 떠봐도 불화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가운데 윤곽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유리에 바짝 붙어 유리 안쪽 천장을 살펴보았다. 형광등인지 산란광을 내는 듯한 불빛이 있었지만 불화를 직접 비추지 않았다. 다시 거리를 두고 불화를 보았지만 불화는 여전히 어두웠고 불화보다 불화와 불화 사이의 여백이 더 밝게 보였다.
전시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실내가 겨우 40~50평? 그 안에는 나이가 드신 분들이 오페라 스코프를 가지고 한 작품 앞에서 불화의 어떤 부분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대개의 사람은 작품 하나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그렇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흘러가듯 대충 작품을 보았다. 그러던 중 전시장의 3분의 2쯤 돌았을 때 '수월관음상'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세상에!여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어떤 형상이 자체 발광을 하고 있었다. 발이 멈추는 것은 심장이 멈추는 것. 형형한 색은 화려한 듯 절제되고 도도한 듯 숨을 쉬고 있었다. 거기다 선 하나하나가 마치 비단 실 한 올 한 올 같은 유려함이라니.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까지 연출해 내는 일본 사람들의 세심함이라니.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보자,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고려 불화가 자체 발광을 하고 있었다. '청자음각연화당초문정병(靑磁陰刻蓮花唐草文淨甁)이 그냥 비취색을 띤 자기가 아니라 진짜 옥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고려의 선조들은 비췻빛이 나는 자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어떤 것을 흙으로 구현하고자 했구나! 그것을 일본에서 보게 되다니….
거기에는 손바닥 하나 반 길이의 경전들도 있었는데, '갈지금자대방광불화엄경'(褐紙金字大方廣佛華嚴經)과 '감지은자묘법연화경'(紺紙銀字妙法蓮華經) 등이었다. 세필로 금을 입혀 그린 그림들의 선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던지 마치 CPU의 회로도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두는 '나전국화문경상'(螺鈿菊花文經箱)과 '나전목단당초문경상'(螺鈿牧丹唐草文經箱)의 풍모는 정갈했지만 그 경상 표면에 그려진 문양은 더없이 세밀해 풍모의 정갈함과 더불어 귀한 것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로 보여 주었다.
내가 본 이 모든 것은 불행하게도 도적질을 당했든 갈취를 당했든 우리 소유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그렸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불화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는 마음의 산물이다. 우리에게 이런 정교하고 기품이 나는 정신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본이 배우고 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의 정치판은 어떤 정신세계를 후손들에게 그려주고 있는가?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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