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를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우리말로는 '탈(脫) 진실' 정도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정의를 옥스퍼드 사전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객관적인 사실(또는 진실)이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에 호소하는 것보다 덜 영향을 미치는 상황과 관련된, 혹은 그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한마디로 '사실이나 진실보다 감정에의 호소가 더 잘 통하는 사회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지지자를 의미하는 '브렉시터(Brexiteer)'와, 주류정치를 거부하고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의도적으로 논쟁거리를 퍼뜨리는 극단적 보수주의 이념집단을 뜻하는 '알트 라이트(alt-right, 대안 우파)'가 경쟁 단어였다니 한마디로 작금의 세계적인 사조의 현주소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포스트 트루스(탈 진실)'라는 단어는 1992년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한 당시 레이건 정부의 부도덕함을 비판할 때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트럼프의 미 대선 공화당 후보 지명 이후에 그 사용빈도가 전년도보다 무려 20배나 급증했다고 한다. 주로 정치권에서 진실과 다른 내용으로 유권자나 시민들을 호도할 경우에 사용된다.
옥스퍼드 사전의 캐스퍼 그래서홀 대표는 선정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데는 기득권이 제공하는 팩트(사실)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면서 나온 것이며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단어라 해도 놀랍지 않다"고 일갈했다. 또한 뉴욕 타임스는 2016년 8월 24일 자 사설을 통해 우리 사회는 포퓰리스트 운동과 소셜 미디어가 결합해 '탈 진실 정치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유세 기간 중 트럼프가 사실이라고 내뱉은 주장의 70%는 거짓에 가깝다는 폴리티팩트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비이성적인 유권자들의 무분별한 지지를 꼬집은 것이다.
개인이 자기 성향에 맞는 미디어 콘텐츠를 집중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자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한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다. 천안함 사건이나 광우병 사건 그리고 세월호 사건 때에 쏟아지는 뉴스와 온라인상의 담론들 속에서 국민은 무엇이 사실이며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최순실 사건으로 인해 국가가 극도로 혼란한 지금도 우리는 한 개인의 국기 문란과 대통령의 탈법적인 국정 운영이라는 사태의 본질과 동떨어진, 3류 잡지에서도 입에 담기 어려운 얘기들까지 보고 들으며 무너져버린 국기 이상으로 국민적 자존감의 상실이라는 정신적 충격의 나락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시대는 바야흐로 개인들이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고 그 뉴스를 향유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가 된 지 오래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범람이 기존 언론의 신뢰성을 흔들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혹은 악의적으로 왜곡된 사실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이 사회 현상은 지금의 우리나라 사정에서 더욱 심각하다. 국민이 정치권 혹은 선동주의자들이 생산한 오도된 사실 중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수용하고 신념화하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는 데 큰 국가적인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켜온 것은 '진실'이라는 사실의 존재였다. 어떠한 왜곡이나 정치 술수가 난무한 시대에도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지켜준 것은 진실이었고, 그 진실을 밝혀낸 참된 언론의 사명감 어린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국가의 위기를 정치권에 맡기기에는 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자기 계산적인 권력 투쟁이 너무 위태롭다. 이른바 '탈 진실 시대'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그동안 기득권이 제공해온 사실을 불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중에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호도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무분별하게 인용되는 조작된 통계나 왜곡된 정보에 대한 스크린 기능도 발명될 것이다. '탈 진실 시대'에 사실을 불신하는 풍토는 한동안 지속되겠지만, 이것을 바로잡는 것이 기존 언론이 할 일이다. 오히려 기회다. 우선 집단적인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국민에게 가십 거리가 아닌 진실에 기초한 뉴스만을 제공하고, 역사적인 국가의 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응하는 행동 양식을 전달한다면 차별화가 되지 않겠는가. '탈 진실 시대'에 참 언론의 '진실 되찾기'를 주문한다.
동원과학기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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