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정국의 어지러운 시국을 틈타 등장한 독재권력에 저항한 1960년 4·19혁명은 국민의 역사적 선택이었다. 군사정권의 기형적인 집중권력을 두 차례나 무너뜨린 1979년 10월항쟁과 1987년 6월항쟁도 지난 세기 국민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21세기에 또 이런 선택의 순간이 올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합법 정부의 꼭두각시 권력을 뿌리치는 2016년 11월의 촛불혁명을 바라보는 국민은 한없이 우울하다. 앞선 선택이 주권을 찬탈한 '비정상'의 권력을 겨냥했다면, 지금은 주권이 한 표 한 표 모여 탄생한 '정상'의 권력을 몰아내는 과정인 탓이다.

내 손으로 뽑은 정부를 내치는 국민의 시선에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제 더는 후진적인 권력 집중현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이글거리고 있다. 경제난은 물론 국가안보나 세계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문제보다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는 새 정부를 일구는 작업이 더 다급하다는 신념이 타오르고 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는 촛불혁명은 앞선 세기의 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정상'의 권력을 부여받았지만, 비합법이 판을 치게 한 까닭에 '비정상'의 권력으로 몰락한 정권의 퇴진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국민은 촛불을 내려놓을 것이다.

촛불을 끄는 국민의 시선에는 또 다른 근심이 싹 틀 일이다. 지난 세기의 역사적 선택이 성공한 뒤 어김없이 뒤따랐던 추악한 일이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 국민적 저항에 밀려 정통성을 상실한 정부가 물러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도 권력 주변의 이성을 잃은 전횡이 반복된 현상이다. 이를 우리의 숙명적인 대물림이라고 한다면 정말 비참해진다. 그때마다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국민 노릇 하기가 정말 피곤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진다. 이 불안감은 지난날의 그것과는 성격이 또 다르다는 느낌마저 슬쩍 든다.

정치가 움직였던 그때는 그랬지 않았나. 저항의 시대마다 세상을 이끌었던 선 굵은 정치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에 포진하고 있었다. 굳이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들 중 일부는 국민의 부름을 받고 정부를 이끌었다. 그들 지도자의 선명한 몸짓과 비전 제시는 한때나마 희망을 던졌다. 비록 창대한 출발의 뒤끝은 초라했지만, 적어도 그들의 권력의지는 국민과 나라를 위해 발동했다는 것만은 인정하자. 일부는 권력의 정상에서 주변 정리를 제대로 못 해 평생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졌지만, 그나마 국가와 사회에 큰 획은 그은 업적도 남겼다. 이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정치가 실종된 지금은 그때와 또 달라 불안하다. 국민의 부름을 받을 만한 시대의 정치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현실이다. 저마다 제가 지지하는 사람이 국가 지도자로서 제격이라 하겠지만, 딱 부러지게 새 정부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국민은 아직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마음 깊은 곳에 권력의지를 잔뜩 심어놓은 사람들만 보인다. 한 줌에 불과한 지지자들을 믿고 큰 꿈을 꾸든,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직전 '부자 몸 사리듯' 조심조심 고지를 향해 나아가든 알 바 아니다. 단지 이번에 촛불을 든 국민의 눈에는 이들이 마뜩잖다. 촛불의 흐름에 따라 좌고우면하면서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만 요란하게 내는 현실 정치가 빚어낸 산물이다.

새누리당은 여당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내팽개치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다음 정부 입성을 위한 새판짜기에 여념이 없다. 갈가리 찢어져 제 살길만 찾는 모양새가 볼썽사납다. 정권교체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이는 야권은 당별로 셈법이 복잡하다.

국민은 벌써 답을 던졌는데도, 정치판에는 촛불혁명의 의미를 자기식으로 해석하기 바쁘다. '국민주권본부', '비상시국위원회' 등 다음 권력을 잡기 위한 제각각의 해법만 난무한다.

일부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국 상황에서 헛발질하기 일쑤다. 뒤늦게 국민과 함께 현 정권의 퇴진에 나서겠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이에 뒤질세라 내년 상반기 조기 대선을 주장하고 나서는 인사도 있다. 그때마다 자기 합리화로 포장된 핑계는 뒤따랐다. 이러니 그동안 숨죽어 있던 현 권력은 슬슬 국정을 재개할 태세다.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정치판에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정통성을 잃은 현 권력은 곧 사라질 운명이다. 국민이 그렇게 명령했다. 이 틈바구니를 비집고 집권 의지를 드러내는 정치 지도자는 많다. 어쨌든 국민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해 선거에서 극심한 반대를 일삼았던 사람들도 열혈 지지자로 돌아서게 하는 멋진 정부를 이끌 지도자를 기다린다. 자기 편의 배만 부르게 하는 정치꾼들이 설쳐대는 꼴을 국민은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부국장 겸 뉴미디어본부장 choonj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