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박한 무당의 놀음에
- 수천만 가슴서 터져나온
- 心火의 바다를 보라
- 불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 성난 '불의 강물' 어찌하랴

- 제 입으로 제 말조차
-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 정치 회복 꿈꾸기 무망하니
- 스스로 물러나는 길밖에 없다

온통 불바다였다. 아니 불의 강이었다. 백만이 넘는 촛불은 불이로되 흐르는 물이었다. 넘실거려 온 도시를 태울 듯하였다. 저 불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분노의 함성은 도시를 무너뜨릴 듯했다. "박근혜 하야!" 옛말이 그르지 않았다. 사람들 혀가 쇠를 녹인다더니, 마음속에서부터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불이 물처럼 흘러내려 쇠를 녹이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3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13일 새벽 서울 종로구 내자동 청와대 방향 사거리에서 경찰의 차벽을 넘으려 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상한 소리는 지난 정권 때부터다. 이명박은 물이라고 했다. 청계천에서 일어나 4대 강에 이르기까지 물의 기운이 정권을 보호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청와대에서도 보인다는 광우병 시위의 거센 촛불도 물로 껐다고들 했다.

박근혜는 불이라고 했다. 새누리당 깃발색이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뀌었을 때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맨날 상대방더러 빨갱이 타령이더니, 갑작스레 빨간색으로 변색하니까 난데없었다.

그렇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그러나 나무를 가득 실은 수레의 불을 어찌 한 잔 물로써 끌 수 있으랴. 아니 불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저 불의 홍수를, 수천만 사람들 가슴에서 터져 나온 심화(心火)의 바다를 과연 어떤 물로써 끌 수 있으랴.

예부터 무당은 있었다. 큰 무당을 성인(聖人)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상형문자인 성(聖)자 속에 귀신의 말(口)을 듣는 큰 귀(耳)를 가진 사람 모습이 들어있다. 아니 무당을 의미하는 무(巫)자 자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工) 사람(人) 모양이라고도 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땅의 사정을 살펴 사람의 원망을 해소하는 것이 무당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칭했고('삼국유사'), 그 아들 남해왕을 차차웅이라 일컬었는데, 차차웅이라는 신라말의 의미는 무당이라 하였다(次次雄, 巫也·삼국사기'). 임금이 무당이던 이 시절을 제정일치의 시대라고 부른다.

무당도 사람인지라 제 욕심을 귀신의 뜻인 양 오도하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의심이 퍼져나갔다. 무당이 이 땅을 떠나는 장면이 '연오랑, 세오녀 설화' 속에 들어있다. 까마귀를 뜻하는 오(烏)는 태양신의 상징인데, 남녀가 다 까마귀를 품고 있으니 연오랑과 세오녀는 박수와 무녀임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천수백 년 동안 무속신앙은 이 땅 밑바닥에서 저류하였다. 불교가 들어오면 '산신'의 이름으로 변하고, 도교가 닥치면 칠성(七星)으로 화하고, 유교가 지배하면 음양오행으로 둔갑했으니, 그 생명력은 강인하고, 변화는 무궁하였다. 하나 대명천지 대한민국 땅에서 천박한 무당이 꼭두각시와 함께 춤을 추는 꼴을 볼 줄은 차마 몰랐다.

이 난국을 어찌할꼬. 불은 물로써 끈다고 하겠으나, 저 '불의 물'은 과연 무엇으로 끌 것인가. 허나 물이니 불이니 하는 말은 한낱 상징이지 참된 말은 아닌 것. 정치의 본령으로 되돌아가 본질을 살펴보자. 공자와 제자 사이에 '정치란 무엇인가'를 놓고 나눈 대화를 떠올려본다.

여기서 공자는 민간경제를 안정시키고 국토방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의 신뢰를 확보하는, 3요소를 정치의 요체라고 지적한다. 제자는 세 요소 가운데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버릴까'라고 다시 묻는다. 이에 공자는 국토방위를 포기하라고 권한다. 국가는 사라져도 사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제자는 또 묻는다. '나머지 둘 가운데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느냐'고. 놀라운 것은 공자의 답변이다. '경제를 포기해야 한다. 사람은 결국 죽게 마련이니 굶어 죽더라도 신뢰가 없다면 그 나라는 성립될 수가 없다'. 이른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는 문자로 회자되는 금언의 내력이다.

여태 우리는 경제와 국방을 정치의 전부로 알고 매진해왔다. 그 신화적 상징이 박정희였다. 1960년대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속에 경제의 염원이 담겨있다면, 70년대 '자주국방' 속에 안보의 욕구가 빼곡하였다. 유신헌법이라는 악법을 감내하면서 우리는 육신의 보존과 생존에 급급했다. 박근혜는 그 그림자다. 그러나 오늘 경제는 파탄이 났고, 국방은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다. 다시금 공자의 마지막 카드인 신뢰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신뢰를 뜻하는 신(信)은 '언어'와 '사람'으로 이뤄진 글자다. 신뢰란 사람의 언어, 혹은 사람다운 말을 의미한다. 정치가 신뢰로 압축되고 또 신뢰가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불신으로 촉발된 이 사태를 잠재울 방법은 말다운 말을 회복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제 입으로 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판명된 지금, 정치의 회복을 꿈꾸기는 무망한 노릇이다.

만백성의 신뢰를 잃었으니, 공자라도 어쩔 수 없다. 불은 물로써 끌 수 있겠으나, '불의 강물'을 끌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길밖에 딴 수가 없다. 끝장이 난 것이다.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