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 줄리오 체사레호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피 코트를 걸친 여성 로사 베르고글리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할 땐 겨울이었지만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녀가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 삶의 종잣돈으로 쓸 보석들을 코트 안감에 꿰매 놓았으니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 기막힌 일은 전 재산을 그 보석들과 바꾸면서 일어났다. 제값을 받기 위해 로사 가족은 출발을 늦췄다. 그런데 로사 가족이 애초 타려던 배가 브라질 해안에서 침몰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마터면 신세계의 꿈이 재앙이 될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다.

1936년 12월 태어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로사 할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바로 교황 프란치스코다. 교황이 2014년 8월 한국을 찾았을 무렵 알려진 이야기다. 그해 4월 빚어진 세월호 참사 유족들에게 교황이 각별한 관심을 두는 배경 가운데 하나로. 교황은 세월호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유족들을 만나고, 유족의 세례를 직접 챙겼으며,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 편지와 묵주를 선물했다. 유족의 고통을 껴안고, 국민이 '잊지 않겠다'며 눈물로 다짐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교황은 4박5일 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만난 교황의 첫마디는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됐느냐'였다.

그래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7시간은?'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와, 승객들에겐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제 목숨만 구한 선장 및 선원들과, 배 속에 갇힌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이 남긴 상처는 여전하다. 특히 그 긴박한 당일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 공백은 반드시 풀어야 할 응어리로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원칙과 신뢰'는 음지에 있던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부상하며 깨졌다. 박 대통령은 국가의 공적 시스템 대신 '어려울 때 도와줬다'는 최 씨에 의지하면서 국기 문란을 자초했다. '대통령의 7시간'은 최 씨의 국정 농단 실체가 드러난 만큼 사생활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박 대통령은 4월 16일 오전 10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처음 세월호 사고 서면 보고를 받았다. 이후 박 대통령이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24회 유선·구두 보고 및 구두 지시가 이어졌지만 대면 보고나 대책회의는 없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대통령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며 방어막을 쳤다. 야당은 대통령이 스케줄 없이 청와대에서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미스터리 7시간'이라고 불렀다. 세월호 참사 원인과 부실한 대응체계 규명을 목적으로 한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가동됐지만 하이라이트인 청문회는 무산됐다. 김 실장과 대통령 일정 담당인 정호성 제1부속실장의 참여 여부로 여야가 충돌한 탓이다.

이 무렵 '비선 실세 접촉설'이 나왔다.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지국장은 8월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정윤회, 최태민,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 등을 거론한 일간지 칼럼을 인용해 박 대통령이 정윤회 씨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을 언급했다. 정 씨는 박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할 때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으며 문고리 3인방을 박 대통령에게 연결해준 인물로 알려졌다. 최순실과 부부였으니 최태민이 장인이다. 법정 문제로 비화한 이 사건에서 정 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이듬해 12월 박 대통령과 관련된 소문은 허위지만 비방 목적은 없었다며 가토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은 성난 민심을 자극했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대통령이 해명했다. 이번엔 최 씨 모녀와 연관된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가 불거졌다. '대통령의 7시간'이 피부과 시술에 쓰여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청와대가 나서 '사실무근으로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다. 대통령의 7시간과 관련한 의혹이 최 씨의 전 남편과 아버지에 이어 본인과 얽히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현 국정파괴 사태가 세월호 참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이 결자해지의 모습을 보일 때가 왔다. 세월호 참사에 진심으로 사죄하는 첫걸음은 그 7시간의 비밀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를 토대로 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대한민국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