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너지진 않겠지? 저기 보수한 자국은 뭐지? 균열인가? 터널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런 상상은 불안감을 낳고 급하게 통과하기 위해 속도를 내게 된다.

가방도 꺼내 짐을 싸 두었다. 일명 '재난 가방'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상용 물도 챙기고 이것저것 미리 챙겨 비상시를 대비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는 영화 '터널'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정작 이런 공포를 심어준 영화는 다른 말을 전하고 있는데 말이다.

영화 '터널'은 붕괴된 터널 내 자동차에 홀로 갇힌 사람의 생존기를 그린 것이다. 영화에서 생존자가 터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37일 동안을 견뎌낼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재난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출구 없는 고립된 터널에 갇힌 생존자는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고립감과 불안감을 견디는 것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는 구조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죽음에 대한 과도한 절망도 없이 남겨진 물과 개 사료를 먹으면서 하루하루의 상황을 견디어 낸다. 덴마크 출신의 작가 이사크 디네센은 죽음처럼 고통스러운 소설 쓰기를 견뎌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한 말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태도를 끌어낸 것이 재난관리매뉴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장지휘자인 소방대장은 생존자의 첫 번째 접촉 때부터 남아 있는 물과 휴대전화 배터리의 사용량을 철저히 조절하도록 했다. 모두 소진된 이후에는 소변 활용법을 알려주거나 자동차 라디오 채널을 통해 생존방법을 전달했다. 전문가의 매뉴얼에 따른 냉철한 관리와 철저한 대응 없이는 극한의 재난상황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는 불안과 공포의 마음적인 동요보다 합리적 사고와 평정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지진이나 재난 이후 막연한 불안감만 자극하는 전조현상이나 괴담에 주목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경주지진이 발생한 이후 여진이 계속되자 괴담도 함께 피어났다. 더 큰 지진이 발생한다는 괴담을 비롯해 '구름 모양이 지진운과 비슷하다'처럼 평소 같으면 무심코 넘길 만한 생활 주변의 작은 현상들에 주목하여 두려움에 떨었다. 괴담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두고 2008년 확산돼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광우병 괴담처럼 불안과 무지를 먹고 자란다. 그래서 괴담에 필요한 백신은 과학적 합리성이다. 영화에서 생존자를 살린 매뉴얼처럼 전문가의 과학적 합리성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원자력발전소를 바라보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경주 지진 후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을 둘러싸고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규 원전 건설계획 중단뿐만 아니라 가동 중인 원전까지 모두 정지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부 있다.

문제는 이런 논의가 과학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 신고리5, 6호기는 원전 건설 기준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신고리5, 6호기는 참조발전소인 신한울1, 2호기 설계를 기본으로 부지특성과 국내외 선행 원전의 경험, 규제기관의 인허가 요구사항 등 안전성과 관련된 개선사항을 설계에 반영해 무엇보다 안전성을 대폭 강화시킨 발전소이다. 내진설계 기준도 우리나라 원전 중 가장 강화된 기준이 반영됐다.

일각에서 문제 제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정상적으로 허가받은 발전소를 정지시킨다는 것은 불필요한 사회비용을 치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진에 둔감했던 우리나라에서 규모 5.8의 지진은 우려와 걱정을 낳게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대지진도 아니고 강진도 아닌 중간 정도의 지진이라는 사실을 보는 냉철한 눈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이젠 더는 지진 나면 다 죽는다는 식의 원전에 대한 불안심리를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키거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확산시켜 국민적 혼란이 가중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과학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이성적인 행위만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불안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으로만 원전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원전에 대해 더욱 과학적인 합리성에 기반을 둔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한국과학기술인총연합 부산울산지역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