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15,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메디치 가문이 활동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문화계에 만연한 지원과 자율의 엇갈린 시선이 빚어내는 예술 후원자와 생산자의 상충관계를 바라보면서 은근슬쩍 메디치 가문을 떠올려 보는 게다.

일단 우리의 문화예술은 활짝 번성의 시대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이 일부 있겠다. 사실 수많은 문화예술인은 아낌없는 지원을 바탕으로 제 기량을 다해 창작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간섭은 싫어한다.

메디치 가문을 대표하는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미켈로초,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기베르티, 도나텔로 등을 후원해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탄생하게 했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선발해 위대한 화가의 길을 걷게 했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의 예술가가 로렌초의 후원과 지원을 바탕으로 예술 활동을 마음껏 펼쳤다.

"지난 수십 년간 나는 돈 벌고 돈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돈 쓰는 것은 돈 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코시모가 남긴 말이다. 그는 돈 쓰는 즐거움을 느낀 것은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일에서였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역사다.

메디치 가문이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다는 '상상의 역사'을 써 보자. 우선 메디치 가문은 지원할 학문과 문화예술인이나 단체, 조직을 찾는 데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해당자가 너무 많고, 장르도 워낙 다양한 까닭이다. 학자도 넘쳐난다. 누가, 어떤 단체와 조직이 이 사회를 학문과 문화예술적으로 윤택하게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이 가문은 큰돈을 내놓고 자발적으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기를 기다렸지만, 서로 지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이나 단체 간 다툼이 또 볼썽사납다. 지원이 이뤄진 뒤에는 이런저런 뒷말만 무성하다. 인류역사를 아로새길 걸작 탄생은커녕 당장 눈에 띄는 작품 하나 찾아보기 어려워 돈 쓴 즐거움을 느낄 겨를도 없다. 매번 지원하고 욕만 한 바가지 들어먹고 있다는 푸념과 한숨이 나올 법하다.

이 시대 코시모는 이런 말을 남길 수도 있겠다. "지난 수십 년간 돈 버는 즐거움만 있고, 돈 쓰는 더 큰 즐거움은 없었네." 부질없는 상상을 한 번 해봤다.

메디치 가문을 능가하는 부자 가문이 있어도 지금은 지원을 바탕으로 학문과 문화예술의 번성기를 이끌 재간이 없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그 시대처럼 지원받아 오로지 창작 혼을 불태우는 문화예술인을 찾기가 어려운 탓도 있다. 학문과 예술 후원으로 돈 쓰는 즐거움을 얻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예술과 학문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세금이 모여 조성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예술 예산이 지원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 혜택을 보는 문화예술인도 일부 있기는 하다. 이는 해당 기업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소수가 누리고 있어 아직은 '그림의 떡'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수많은 문화예술인이나 단체가 각종 기금과 정부 지원에 목을 매는 구조가 돼 버렸다.

이 시대 문화예술계 지원은 메디치 가문의 지원 형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무게를 지녔다. 소비세든 부가가치세든, 갑종근로세든 국민 누구나가 매일매일 알게 모르게 한 푼 두 푼 내는 세금으로 충당한 돈이 지원된다. 정작 우리는 이 돈을 쓰는 즐거움도 모른 채 꼬박꼬박 내고 있다.

세금을 할당받았으면 제대로 쓰고 예술과 창작의 혼을 불태웠으면 좋겠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작품 활동만 충실히 한다면 아깝지 않다. 걸작의 탄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예술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하지만 어쩌나. 지원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문화예술계 풍토를 경계해야 하는 시선이 늘고 있다. 돈 쓰고 야박하게 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 지원에만 그치는 일이 반복된다면 문제가 있다. 돈 쓰임새를 따지면 '간섭한다'는 방어막을 치는 되풀이 행위도 지겹다는 시각이 많다. 그래도 메디치 가문의 지원에는 걸작의 탄생이 뒤따랐다.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지원받은 뒤 구색 갖추기 문화예술 행위에 치중하고, 끼리끼리 문화예술적 자율만 누리겠다는 부류가 판을 친다. 메디치 가문이 수없이 많아도 지원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어느새 굳어져 버린 느낌이다.

문화예술인. 그 이름에는 독특한 향기가 풍길 법한데, 왠지 단어 자체가 박제된 느낌이다. 다 좋다. 술을 사 먹든, 생계를 위해 쓰든 지원하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창작과 작품활동에만 열중하는 문화예술인과 단체를 보고 싶다. 우리 시대 '메디치 가문'들이 기분 좋게 돈 쓰는 재미를 알게 해주면 안 되나.

부국장 겸 뉴미디어본부장 choonj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