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인 홀몸노인 월트 코왈스키. 늘 짜증에 묻혀 산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그는 이웃 몽족(라오스 베트남 등지에 흩어져 살던 소수 민족으로, 베트남전쟁 때 미국 편에 섰다가 미국으로 쫓겨 왔다)에게 "내 땅에서 나가"를 연발하고, '깜둥이' '개나 잡아먹는 야만인'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골통 보수주의자 혹은 인종 차별주의자다. 간섭받기를 죽기만큼 싫어하고, 걸핏하면 총을 꺼내 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녀를 향해서도 침을 '퉤' 뱉는 괴팍한 노인이다.

코왈스키는 2009년 국내에 개봉한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이다. '그랜 토리노'는 30대 중반까지 "영화, 참 시시하다"고 여겨온 기자에게 "영화, 참 멋진 예술이다"며 생각을 바꾸게 만든 작품이다. 이 같은 찬사는 이 영화의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노장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향한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자주 '정치'와 연결된다. 그는 오랜 공화당 지지자로, 한때 우익 파시스트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보수의 가치는 한국 정치에서 우리가 흔히 경험한 것과 확연히 다르다. 항상 혼자였던 코왈스키는 점점 이웃 몽족에게 연민과 정을 느낀다. 그래서 동족 갱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나약한 소년, 이웃집 타오를 '남자'로 훈련시킨다. 갱단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피의 복수를 고민하던 코왈스키는 결국, 자신을 제물로 내려놓으며 타오에게 새 삶을 선물한다. 그리고 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한국전 살상에 대해 속죄한다. 복수와 속죄를 겸한 영화의 결말은 진화하는 따뜻한 보수주의자, 약자 곁을 지키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7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 마치 이스트우드가 "이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런데 1930년생, 우리 나이로 86세인 이스트우드는 아직 할 일이 남았던 모양이다. 이스트우드는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나는 할 일을 다 했는가"라고 묻는다. '설리…'는 2009년 추운 겨울 155명을 태우고 이륙하던 항공기가 양쪽 엔진을 잃고 뉴욕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한국 관객은 '설리…'에서 세월호를 본다.

기장 설리는 뛰어난 판단력과 책임감, 40년의 운항 경륜으로 비상착수를 결정한다. 또 관련 수칙을 엄격히 지키며 강물이 차오르는 항공기에 남아 승객이 모두 구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임무를 다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설리는 상식적이고, 현명하며, 보수적이다. 무엇보다 차가운 강물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승객들에게 설리는 따뜻한 어른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의 보수는 어른스럽거나 따뜻하지 않다. 이유야 어찌 됐건 민생을 팽개친 채 국회에서 밥 달라고, 또는 밥 안 먹겠다고 떼쓰는 건 보수가 아니다. 일주일 단식 후 병원에 실려 가는 당 대표에게 "저희가 곁을 지킬 테니 힘내시라"고 눈물을 훔치면서,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혀 달라며 46일간 단식한 세월호 유족을 외면한 건 보수가 아니다.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숨진 농민을 두고 "부검하자"고 하는 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보수의 모습이 아니다.

"낡은 보수로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고통받는 국민에 대한 배려가 없는 차가운 모습에서, 이념과 정책 지향점을 중산층·서민에 맞추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보수로 바뀌어야 한다. 헌법에 나와 있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 최근 부산을 찾은 여권 한 대선 주자의 자기반성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수가 다수다. 보수가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뀐다.

기획탐사팀장 pear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