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 편의 영화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마주친 제목 하나가 훅 가슴을 두드리는 영화라면, 몇 줄의 영화 소개글이 색다른 기대를 갖게 했다면, 애써 그 영화를 관람하고 난 후 안타까운 아름다움이 강물처럼 오래 흐르는 영화라면, 영화 한 편으로 감히 삶을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처한 현실이 뚜렷하게 손에 쥐어지는 아무것도 없이 불명확하고 불확정적인 상황의 연속이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계획하고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삶이 삐끗하고 헝클어지는 혼란 속에서 피로를 느낀다면, 어둠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관람석에 몸을 파묻고 한 편의 영화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한없이 센티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다행히 과장되지 않은 스토리가 내 삶을 담담히 마주한다고 느끼게 했다면, 지극히 소시민적인 이 삶이 비루하지 않고 우아하게 느껴진다면, 설레며 영화를 기다린 며칠과 영화를 보는 순간은 물론이고 그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알 수 없는 고양된 분위기에 잠기게 한 영화 한 편에 충만한 행복이 있다.

프랑스 영화 'L'avenir'를 관람했다. 국내에는 '다가오는 것들'로 해석된 영화는 내게 강한 자장을 일으켰다. 늙어가는 것의 상징인 주름과 처지는 피부를 가감없이 드러낸 나탈리 역의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아름다웠다. '다가오는 것들'은 숙명적으로 읽혔다. 피할 도리 없이 다가오는 것들은 실존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등장인물의 삶의 철학을 관통하는 오브제는 각자가 읽는 책으로 드러내주지만 자칫 철학적인 독서가 주는 무거움을 가라앉히는 미아 한센-러브의 연출력은 돋보였다. 여주인공 나탈리가 손에 든 레비나스의 '난감한 자유'는 자유를 찾았지만 공허하기만 한 자유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제자 파비앙의 책장에 꽂힌 유나바머는 과학자들에게 폭탄테러를 자행하며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진보적인 혁명가를 추앙한다는 것이다. 하인츠의 쇼펜하우어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의지와 우연성으로 행동하는 남편 모습을 대변한다.

영화는 한 사람의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의 얼개들이 갈등 양상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담하게 묘사되는 쪽이다. 갈등을 부각시켜 해소하기 위해 사건을 드러내는 식이 아니라 이미 당도한 상실의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넘어서는지를 철학에 기대 풀어내는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담담하게 절제된 표정연기는 삶의 고비를 마주한 사람의 태도로 안타깝게 아름다웠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대사가 아니라 엄마 장례식에서 낭독하는 '팡세'에서 잘 드러났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반복되는 상실 앞에서 무표정하고 담담한 그녀의 표정은 불확정적이고 불명확한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와 고뇌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 가을 홀로 관람하기에 외롭지 않은 영화였다. 실체는 없이 공방만 난무하는 천박한 SNS의 홍수 속에서 빠져나와, 요즘 자주 울리는 긴급재난문자의 불안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훔쳐보며 비루한 삶이 담담하고 깊이 있게 고양되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좀 철학적이면 어떤가. 그것이 삶을 해석하는 방법이라면. 흥분할 만한 화려한 볼거리가 좀 없으면 어떤가. 울고불고 해본들 달라질 것도 없는 현실이라면.

늙고 병든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탈리의 삶에 끼어들어 평화를 무너뜨리다가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가 버린다. 철학적인 견해의 일치로 소통가능하다고 여겼던 제자와의 엇갈림은 순차적인 상실을 가져다주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는 삶이 불합리할뿐더러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진실로 가득하다는 실존주의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그 자체로서 충족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고 읊조리는 알랭의 '행복론'은 결과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행복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게 한다. 이어지는 관계의 상실 속에서 그것을 견디는 장치로 작용하는 고양이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엄마가 남긴 판도라가 케이지에서 꺼내지는 장면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두운 밤 숲속에서 사라진 판도라를 애타게 부르는 나탈리의 감정은 거기서 간절하게 드러나고야 마는 것이다. 행복은 도달한 순간이 아니라 도달하기까지의 지속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망'이라고 말했으므로.

인간에게는 미래(L'avenir)가 결핍돼 있다고 한 사람은 실존주의자 게리 콕스이다. 오지 않은 미래는 완전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영원한 시간의 행진은 자신의 모습을 속이고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게 훼방 놓는다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