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재개발 잡음도 없이 조용한 이 동네에 산 지 5년째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골목들 사이로 오래된 주택들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다섯 가구씩 통로 겸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물 두 동이 마주하고 있는 옛날식 빌라는 집집마다 현관 앞에 작은 정원이 있어서 어떤 집은 꽃나무가 자라고 어떤 집은 텃밭으로 가꾸고, 어떤 집은 잡초가 무성하고, 어떤 집은 흙더미 위에 재활용으로 내보낼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다. 텃밭에서 자라는 고추, 가지, 오이, 상추, 깻잎들이 얼마나 싱싱한지 상추 몇 잎을 슬쩍 따오고 싶은 때도 있었다. 절기마다 바뀌는 작물을 보면, 어지간히 부지런한 주인이라 추측되건만 어째 얼굴을 마주한 일은 한 번도 없다.

식물 말고 동물 키우는 집도 몇 집 있다. 앙칼지게 짖는 소리로 봐서는 소형견을 키우는 것 같은 맨 앞집은 집주인이 야간 업무를 하는 직업을 가졌는지 개가 밤마다 짖어대는 데도 말리는 기색이 없다. 어떤 밤에는 늑대가 짖는 것처럼 길고 구슬프게 울어서 누군가 그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지만 집주인은 없고, 개는 더 사납게 짖어서 문 두드리는 사람이 소형견과 고성방가 배틀을 하듯이 욕만 잔뜩 퍼붓고 사라졌다. 그도 빌라에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문 두드린 그 사람이 자기 집 문을 쾅 닫을 때, 우리 집 문도 떨어질 듯 흔들렸으니까.

손님치레가 잦은 옆집의 소음도 빼놓을 수 없다. 개 키우는 집은 밤에 시끄럽고 옆집은 낮에 시끄럽다. 조용할 때는 숟가락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도 다 들리는 빌라 구조 탓에 옆집 손님들 간의 담소가 확성기를 달아놓은 듯 온 동네에 울려 퍼진다. 그렇지만 정작 홀로 사는 그 집 주인만은 본 적이 없다. 손님들이 오면 화투판을 벌이고, 그 돈으로 술판이 벌어지고, 술을 먹으면 싸움이 나고,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혼자 꺼이꺼이 우는 옆집 사람은 TV를 켜놓고 잠드는 버릇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건 반대쪽 옆집 부부도 마찬가지다. 부부 싸움할 때마다 우당탕 소리가 빌라 전체를 울렸다. 싸움이 끝나면 부인은 털털거리는 구식 세탁기를 돌리고, 남편은 밖에 나와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그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맞은 편 가구의 흡연자들도 슬그머니 불러낸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이웃집 소음들을 참아내다가 창을 넘어 들어오는 담배연기는 도저히 이기지 못해 시위하듯 창문을 쾅 닫았다. 천식 때문에 담배연기, 개털, 고양이털, 먼지, 꽃가루라면 질색하는 나는 이웃들의 불쾌한 존재감에 맞서 드디어 소심하게나마 내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창을 닫아두니, 옥상을 데웠던 열기가 2층 방에 그대로 전해졌다. 호기롭게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열기도 머쓱해 샤워라도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는 순간, 욕실이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느낀 지진을 욕실에서 맞는 황망함 때문인지 대피고 뭐고 한참을 꼼짝없이 서 있었다. 민망함과 공포가 샤워기 물줄기처럼 지그재그로 쏟아졌다. 간신히 물을 끄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죽인 채 스마트폰을 뒤졌다. 지진 소식은 아무데도 없다. 하필이면 며칠 전에 봤던 재난영화의 장면들이 스쳐갔다. 터널 속에 갇혀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배우의 리얼한 연기가 내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 집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괜찮아요? 밖으로 나오이소, 퍼뜩."

낯선 목소리에 허둥지둥하다가 문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빌라 사람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이 동네에 살게 된 지 5년 만에 드디어 빌라 사람들의 얼굴을 목격한 것이다. 전조현상으로 그 존재를 예고했던 지진의 존재만큼이나 이웃들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이 얼떨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와 냄새, 진동으로만 느꼈던 이웃들의 실체, 우리의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예측불허인지, 나름 견고하다고 믿었던 나 자신의 울타리가 얼마나 빈약한지 등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나왔지만 마치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신발을 신고 있지만 맨발과 다름없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무방비함 속에서 그나마 가장 먼저 손을 내밀고 도움을 준 존재가 불쾌한 이웃들이라니.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건 앙칼지게 짖어대는 소형견 때문만은 절대 아니었으리라.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