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의 달인'.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행정의 달인'으로 기억하는데. 고건(78) 전 국무총리 얘기다. 그의 이력을 되짚어봤다. 여야를, 진보와 보수 정권을 넘나드는 이력에 "아~"하는 소리가 나왔다. 총리는 30대와 35대 두 번, 그것도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지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땐 대통령 직무까지 대행했다. 서울시장 역시 노태우 정부(관선)와 김대중 정부(민선 2기) 때 두 번 역임했다. 박정희 정부 때는 37세의 최연소 전남 도지사를, 전두환 정부 땐 국회의원(12대) 교통부장관 농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정권은 바뀌어도 '고건'은 영원하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처세를 얼마나 잘했기에.

'처세의 달인'이란 이미지가 머릿속에 심어진 데는 열국지 탓도 크다. 2004년 5월 초. 퇴임을 앞둔 고 전 총리는 출입기자들에게 열국지 1질(12권)씩을 선물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그때 그가 남긴 말은 의인물용(疑人勿用) 용인무의(用人無疑).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않고, 한 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인사권자였던 노 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꼬집은 것이다. '처세의 달인'치고는 뜻밖에 그리고 상당하게 저항을 한 셈이다.

기사를 본 그날부터 열국지를 밤낮없이, 시간 나는 대로 읽었다. 그때 짐작했다. 고 전 총리가 처세의 지름길을 어디서 찾았는지를. 열국지 속의 세상은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난세일수록 처세에 능해야 하고, 아군이 아니면 적어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세상을 사는 기술이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이기고 짐을 사례별로, 고사성어와 함께 친절하고 재미있게 귀에 속속 들어오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삶의 자세가 바뀐 것 같다. 강하면 부러지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깨달은 탓이다. 바람이 '좌'로 불든, '우'로 불든, 자세만큼은 중간 지점에 두려 했다. 살아남는 데는 유리할 것 같았다. 이성은 생존본능을 우선할 수 없다는 걸 되뇌고 또 되뇌었다. 세상과의 접점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글 같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12년 6개월 만, 마흔 즈음의 일이다.

그 후 고 전 총리가 정계를 은퇴하는 과정을 보면서 또 한 번 생각의 전환을 맞게 됐다. 그때 알았다. 처세는 살아남는 데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2007년 1월 그는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역량이 부족함을 통감한다"라는 변을 남기고 떠났다. 대선을 11개월 앞두고 지지도 1위를 달리던 그였다. 무엇이 최정상 바로 밑까지 간 그를 멈추게 했을까.

이보다 한 달 전, 노 전 대통령은 고 전 총리를 지명한 것을 두고 "실패한 인사였다"라며 흠집을 낸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당시 범여권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를 두고 '노(NO)'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런 영향이었을까. 고 전 총리는 얼마 뒤 정계를 은퇴했다. 모양새도 영 좋지 못했다. 처세의 달인이 최고 권력자에게 모처럼 고개 한 번 뻣뻣하게 들었다가 바로 꼬리 내린 형국이랄까. 대통령의 지지가 없으면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현실적인 판단을 했는지도 모른다.

처세만 가지고는 세상일을 모두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대권으로 가는 길목에는 민심이란 심판관이 있었다. 민심을 얻으려면 처세에 더해져야 할 '알파'가 있어야 했다. 승부사나 보스 기질 등 싸움의 기술은 기본 자질이다. 세상의 비전과 희망도 보여줘야 한다. 세상은 수많은 생물이 뒤섞여 먹고 먹히면서 발전하는 정글이 아닌가. 그 속에서 1명만 살아남는 게 대선이란 링이다. 2등은 없다. 그래서 대권은 하늘이 점지한다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니까.

10년 가까이 잊고 살던 고 전 총리의 추억을 되살리게 한 사람은 반기문(72) 유엔사무총장이다. 반 총장이 1년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에서 상한가다. 그런 반 총장에게서 고 전 총리의 그림자를 본다. 대선을 1년3개월 앞둔 시점의 여론조사 1위, 여권의 대세론, 현실정치 경험이 없는 관료 출신, 70대 전후의 나이, 정치권 주변만 오랫동안 빙빙 도는 그래서 권력 의지를 의심받는 등등.

여야를 넘나드는 모습에서는 고 전 총리가 거쳐 간 결말의 그림자마저 그려진다.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대중 정부 때 외교통상부 차관과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과 외교통상부 장관에 이어 여권의 유력 주자로 대통령을 꿈꾸는 모습이 고 전 총리를 닮았다. 세상에 가득 찬 모순과 갈등을 헤쳐 나가는 리더십은 아직 보여준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이다. 둘러싼 상황이 빚은 상상력일 수 있다.

이제 다시 확인하려 한다. 최고 권력자 1인의 마음과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대부분 한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 총장의 선택이 궁금하다. 고 전 총리의 길을 답습할지 아니면 극복할지.

편집국 부국장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