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몇 달 전, 이사를 처음 계획했을 때만 해도 예산 절감차원에서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한 만큼 최대한 심플함을 강조한 미니멀 스타일의 집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벌이자 어째 미니멀과는 점점 멀어진다 싶더니, 어느새 예산이 초과했고 집을 정리하는데도 꼬박 석 달 넘게 걸렸다. 도대체 그놈의 집이 뭐기에. 나는 도대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었던 것일까.

설령 혼자 사는 집이라 해도, '내 집'보다는 '우리 집'이라는 표현이 왠지 더 자연스럽다. 더 익숙하고 매끄럽게 들리며, 훨씬 더 집답고 덜 공격적이다. 이는, 집이란 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바탕으로 한 관계지향적 단어이며, 집이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이면서도, 거주 구성원에게 운명공동체적 집단성을 요구하기도 하는, 이른바 폐쇄와 개방의 이중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는 공간이 바로 집인 셈이다.

또한, 집은 단독의 개념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중의적이거나 다의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전혀 상반되는 모순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아주 독특한 공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집이란, 기하하적 구조물 그 자체를 말함과 동시에 집안 내부 분위기나 공기, 사람들, 심지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정서를 전부 포괄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된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그것들에 관한 기억과 느낌은 각각 단절되거나 따로 떨어지지 않고 연속된다. 그것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완성이 되었을 때 집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 역사는 어느 긴 겨울 밤, 깊은 달빛 아래에서 다음 세대로 은밀히 구전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전달되어 왔으리라.

집을 단지 창과 문, 천장, 벽, 바닥 등의 구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에 머무를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점, 선, 면으로 이뤄진 세상의 여타 건조물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을 특별히 더 요구받기 때문이다. 수많은 아파트 광고들이 어떤 이미지를 부각하는가를 살펴보면,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우리가 어떤 기대감과 욕망을 가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분명 그것은 단순한 거처, 주거지 그 이상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집은 '바깥'보다는 '안'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성질로 보더라도 집은 외향성보다 내향성이 짙다. 그리고 공격보다는 방어의 느낌이 더 많이 든다.

만약, 불행히도 누군가에게 집이 박차고 뛰쳐나가야 할 곳으로 인식돼 있다면, 그를 포함해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내밀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집은 출입 모두 가능하지만, 나가는 곳이기보다 들어가는 곳, 돌아오는 곳으로 먼저 연상되며, 그게 좀 더 정상적이고 안정적이라는 느낌이 있다. 머물며 쉬고, 보호받는 곳으로서의 욕망을 담고 있는 공간이 집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고 평온하며, 따뜻하고 행복하다는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고 싶은 것이다.

집은 위협적이며, 적대적인 외부세계로부터의 피난처이자 휴식처이다. 기억과 추억의 흔적이 켜켜이 배어있는 과거이기도 하면서, 꿈을 꾸고 상상하고 몽상하는 그대로의 미래이기도 하다. 집은 내·외부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은 견고하고 튼튼하며 안전해야 한다. 계절의 시련에 맞서 싸우는 용맹무쌍함이 있으면서도, 깊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어미 새의 날개 속이어야 한다. 커다란 둥지여야 한다. 집이 그러한 장소가 되었을 때,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훌륭한 탐험가가 될 수 있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나갈 용기가 생기고 훨씬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내 집이 든든한 응원군과 지지자가 되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여행의 피로와 모험 중의 갖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쉽게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아, 대한민국!'이 이제는 우리에게 그런 집이 되어 준다면 좋겠다. 안일하고 방만한 태도로 직무를 유기하지 않고 집으로서 한 가지의 목적이라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우리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 진심으로!

연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