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유례없이 강도 높은 지진이 잇따르면서 영남권 주민들이 연일 불안에 떨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오른 글이 눈길을 끌었다. 경북에 살고 있다는 글쓴이는 지진도, 원전도 무서워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다고, 고향을 뜨기로 가족과 상의했단다. 이민을 갈 형편은 안 되니 국내에서 어디로 옮겨야 안전하겠는지 물어보는 글이었다.

회사원이라면 직장을 옮기거나 그만두는 것도 감수해야 할 것인데, 이번 지진에 얼마나 큰 불안을 느꼈으면 삶의 터전을 떠날 생각마저 하게 됐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자녀의 공부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을 '가고 싶다'는 희망을 담은 글은 종종 볼 수 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이민'이 아닌 이사를 계획하는 글은 처음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고향을 떠나겠다는 이유가 생존 문제 때문이라는 점이 더욱 절절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올해 7월까지 한국 국적을 상실하거나 이탈한 사람은 21만2569명이었다. 주목할 점은 2007년 2만3528명 수준이던 국적 포기자 수가 올해 급격히 늘어나 7월 기준에 벌써 2만5362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각종 사건사고와 정부의 무능한 대책에 실망한 이들이 '헬조선' '3포 세대'에서 더 진화한 'n포 세대'로 대표되는 현실을 벗어나려고 대한민국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숫자로 입증된 셈이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에서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를 무조건 내부 혼란을 야기하는 세력으로 치부하는 박 대통령의 인식은 집권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뒤늦게나마 재난 발생 시 이를 총지휘할 국민안전처가 만들어졌지만, 이번 지진 대응에서 국민안전처의 무능력은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 오염 우려 수산물 수입 문제나 중국발 미세먼지 대책 등에서도 정부는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담보해주지 못하니 국민들이 정부 정책이나 통계 자료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나서고 있다.

지진 공포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우리보다 경험이 풍부한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나 앱으로 몰려들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지진 괴담으로 실체 없는 불안감만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북한은 연일 핵미사일로 안보를 위협하고, 국내에서는 천재지변으로 국민들의 불안감만 높아지고 있지만 정부는 국민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청와대와 정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는 인물이 설립을 주도했다는 재단법인에 며칠 만에 대기업들의 기부금이 900억 원 가까이 쏟아진,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은 일들에 대해 국민적인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나무라고 있다.

창조경제도, 외교 성과도 홍보성 발표에 그칠 뿐이다.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고 말했던 박 대통령은 과연 어떤 퇴임사를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서울정치부 차장 tg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