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더위였다. 중복을 넘기며 치솟은 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누진 전기요금 폭탄을 끌어안더라도 에어컨은 쌩쌩 돌아가야 하고, 냉장고에는 찬물에 얼음까지 가득해야 했다. 숨고르기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열기만으로도 숨 가쁜 그야말로 염천(炎天). 그럼에도 처서를 넘기며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고약한 여름이 서서히 물러나는가 싶다. 무화과가 마트에 고개를 불쑥 내민 것도 이즈음이다.

어린 시절 옆집 화단에 무화과나무가 여럿 있었다. 벽돌담 하나가 가로막혔을 뿐 옆집은 창문만 열면 별의별 게 다 보였다. 덩치 큰 개가 대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모양새며 그 사이로 아침마다 마당에 쓸던 아저씨와 장독대를 오가던 아줌마의 모습을 보기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친구와 그 동생들이 처마 밑을 오락가락하기라도 하면 서로를 부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잠을 설치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분주하고 때로는 허허로운 모습은 여름이면 삐죽빼죽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무화과나무가 떡대같이 가로막은 까닭이다. 겨우내 뭉뚝 잘려나갔던 가지들은 어느새 사방팔방으로 뻗어 담을 넘어온 지 오래였다. 잎들은 얼마나 크고 넓적한지 모른다. 거인의 손 같은 나뭇잎이 아프도록 손가락을 쫙쫙 펼치고 경쟁하듯 하늘을 받들고 있었다. 어긋나게 자리 잡았건만 몇 잎 아니어도 수북해 보였다. 그렇게 무화과나무는 멋없이 잘 자랐다.

어느 날 무화과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옥상 계단에 늘어뜨린 나뭇잎 사이로 검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열매가 야무지게 매달려 있었다. 높고 넓게 나뭇잎만 거느린 나무인 줄 알았는데, 그 사이로 열매를 품고 있었을 줄이야. 가지에 목을 내민 무화과는 둥그스름한 자태를 드러냈지만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질 듯했다. 순간 호기롭게 무화과를 뚝 따서 배를 가르고 말았다. 하얀 내피 안에 보라색 수술이 촘촘히 박힌 모양이 징그러웠건만 짙은 향과 흐르는 과즙을 질끈 한 입 베어 물었다. 물컹한 무화과가 달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맛에 취해 나머지 반쪽을 먹으려는 순간, "야!"하는 친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들켰구나!'하는 생각에 어쩔 줄 몰랐다.

호기심 천국의 탐구력이 발동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거니 하고 스쳐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무화과 주인론은 다양하게 변주되는 질책 속에 이어졌다. 죄책감에 주눅 들었던 것도 잠시, 묘하게 용심이 일어 오성과 한음 버금가는 궤변으로 받아쳤다. 당연히 친구의 화를 부추겼고 둘 사이에 언성이 더없이 높아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던 어머니들의 제지에 일단락되었지만 둘은 이미 상종 못할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날 오후 채반 가득 무화과를 들고 오신 아주머니를 보며 얼굴을 들지 못했지만 친구와는 한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그때 미안하다 할 걸'하는 후회가 짓눌렀지만 소용없었다. 잘못은 지우고 자존심만 꼿꼿하게 내세웠던, 부끄러운 자화상은 무화과의 더없이 달콤했던 기억과 함께 겹쳐 있다.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 열매가 아니라 열매 안에 화려하게 농익은 꽃이 숨어 있다. 드러나지 않아 오해받기 십상인데다 열매조차 두드러진 외양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데도 무화과나무는 각종 문헌에서 다양한 비유나 상징을 품고 있는 대상으로 곧잘 활용됐다. 이솝우화에서 보듯 무화과는 탐욕을 경계하거나 사물마다 제몫이 다르다는 등의 교훈을 전하는 소재였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성경에서도 무화과나무는 유다의 건실한 믿음을 상징했다. 외양에 휘둘리지 않고 참을성 있게 제몫을 다하는 믿음직한 나무인 셈이다. 그런 믿음을 주고 스스로 따를 만한, 이른바 멘토의 품격을 갖췄다 하겠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너나없이 멘토를 요구하고 또 멘토를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무화과나무 같은 멘토의 자격을 갖춘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시끌벅적한 정국만 보더라도 믿음을 주고 따를 멘토가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다.

마트에서 사온 무화과는 검붉은 외양과 달리 달콤함이 덜하다. 아니 어느 무화과도 그때 몰래 먹었던 만큼 맛나지 않았다. 쟁여둔 기억을 슬금슬금 꺼내어 미묘한 단맛에 더 취했는지도 모른다. 모양 빠지게 넓고 길기만 한 산복도로를 끼고 나지막한 양옥과 한옥들이 줄지어 있던 고향 마을, 더욱이 뒷산을 넘어 온 날쌘 바람이 회오리쳐 태풍동이라 고쳐 불렀던 그곳에는 시도 때도 없이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랬던 마을에 그 옛날의 풍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시계획에 밀려 아스팔트 가득한 도로로 단장한 지 오래다. 벗과 이웃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기억 저 편에 묻혀 버렸다. 그럼에도 무화과를 먹을 때면 철없던 시절의 실수가 아직도 콕콕 들이민다. 이틀째 식탁에 올려둔 무화과는 온통 내 차지가 되려나 보다. 아이들은 낯선지 섣불리 먹으려 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맛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추억의 풍미를 한동안 지독하게(?) 즐겨야 할듯하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