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라는 뜻으로, 격이나 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요즘 집에 있는 에어컨이 여름의 화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불볕더위에도 대부분 가정에서 '전기요금 폭탄'이 두려워 제대로 틀지 못하고 모셔놓다시피 해서다. 가정용 전기요금은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단위 요금이 최고 11.7배까지 비싸지는 누진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월평균 사용량이 100㎾h 이하면 ㎾h당 요금이 60.7원이지만 사용량이 500㎾h를 넘으면 요금은 709.5원이다. 에어컨을 오래 가동하면 한 달 전기요금이 20만 원가량 나오니 마음대로 틀 수 없는 노릇이다. 전기를 많이 쓰면 쓸수록 전기요금이 폭발적으로 비싸지는 징벌적 구조다.
요 며칠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경기를 TV로 보고 있으니 신영복 선생의 옥중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없는 사람이 하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문제는 전기요금 누진제가 전체 전기 사용량의 13.6%에 불과한 가정용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자료를 보면 산업용 및 상업용 전기 사용량은 지난해 기준 각각 56.6%와 21.4%이다. 가정용보다 비중이 훨씬 높다.
우리 국민이 전기를 많이 소비할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와 비교해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은 2012년 기준 1278㎾h로 OECD 36개 중 26위다. OECD 평균(2335㎾h)의 절반, 미국(4374㎾h)의 3분의 1 수준이다. 반면 산업용과 상업용을 합친 전체 전력 소비량은 OECD 8위로 평균의 배여서 괴리가 있다. 정부가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예방과 과소비 억제를 명분으로 가정용 전기에만 누진제를 적용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고 형평에도 어긋난다.
상업용 전기에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다 보니 출입문을 열어놓은 채 에어컨을 트는 '개문 냉방' 점포가 많다. 본지가 지난 9일 부산 부산진구 서면 일대 지하상가 점포 400곳을 확인했더니 '개문 냉방' 중인 점포는 362곳에 달했다. 전기료 걱정에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시민들로서는 머리에 뚜껑이 열릴 지경이다. 화가 날 일은 더 있다. 부당한 전기요금 체계로 국민이 고통받는 동안 국내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한국전력은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46% 증가한 6조3097억 원이었다. 한전은 지난해 11조3467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한술 더 떠 한전은 전기를 많이 쓰는 대기업에 누진제를 적용하기는커녕 2012~2014년 3년간 전기요금 3조5418억 원을 할인까지 해줬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서울 은평갑) 국회의원은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통해 "최근 3년간 삼성전자(4291억 원) 포스코(4157억 원) 현대제철(4061억 원) 삼성디스플레이(3716억 원) SK하이닉스(2361억 원) LG디스플레이(2360억 원) LG화학(1684억 원) 등이 1500억 원 이상의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봤다"고 밝혔다. 정부와 한전이 대기업의 수출 가격쟁쟁력 확보를 위해 전기요금을 깎아주려고 누진제를 적용해 시민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가 준조세 성격의 전기요금에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국민을 상대로 '전기 장사'를 한 꼴이다.
전기요금 누진제는 1973년 석유 파동 당시 만들어졌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현실과 동떨어진 만큼 손을 봐야 할 때가 됐다. '국민은 비싸게, 기업은 싸게'라는 전기요금 체계는 시대착오적이다. 대기업 전기요금부터 조정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시민이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도 폐지와 전기요금 집단소송에 동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폭염 속에서 왜곡된 전기요금 체계를 바라보는 국민의 분노는 폭발 일보 직전이다.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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