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한중 언론에 그의 애독서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책은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펑유란(馮友蘭·1895~1990)의 명저 '중국철학사'였다. 박 대통령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절 나의 인생에 큰 스승으로 자리 잡았던 책"이라며 "논리와 논증을 중요시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에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는 도리와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가 녹아 있다"고 했다.
그는 책의 인상적인 글귀들을 수첩에 적어 놓고 생각날 때마다 본다고도 했다. "깊은 방안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네거리를 다니듯 조심하고, 작은 뜻을 베풀더라도 여섯 필의 말을 부리듯 조심하면 모든 허물을 면할 수 있다"는 게 그 중 하나였다. 지난해 2월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63회 생일을 맞아 중국 팬클럽 '근혜연맹' 회원들이 보낸 축하편지와 메시지 등을 번역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거기에 이 글귀가 인용돼 있기도 했다.
대통령이 나서 방문할 나라의 철학 서적까지 미리 탐독할 정도로 공을 들인 덕분에 당시 한중 외교는 낙관적으로 진행됐다. 중국 정부는 박 대통령을 '오랜 친구(老朋友·노붕우)'라고 부르는가 하면, 귀국하는 박 대통령에게 문화재로 지정된 펑유란의 친필 족자를 선물하는 등 우호적으로 대했다. 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미중 균형외교에 파란불이 켜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긍정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그건 아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은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의심될 만큼 한중 관계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한미 정부가 최근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주한미군에 배치키로 결정한 것 때문이다. 중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사드 배치가 자국의 전략적 안전을 훼손하고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을 깨뜨린다고 판단해 우리에게 추진 중단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미중 간의 핵 전력이 300 대 1로 불리한 상황에서 사드가 배치되면 1의 전력마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은 자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하더니, 지난 25일에는 급기야 "한국 쪽이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지 들어 보자"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필요한 조처를 취하겠다는 경고성 발언을 했다. 반면 북한과는 라오스에서 2년 만에 북중 외교장관 회담을 여는 등 두드러진 밀착 행보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려고 미국과 공조해 제재에 나섰던 종전과 판이한 모습이다. 이러다 주한미군에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이 동북아의 세력 균형을 위해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한반도가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로 재편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정작 안타까운 사실은 사드 배치의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는 거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드 배치를 결정했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도입할 사드 1개 포대가 6기의 발사대와 48발의 요격미사일로 구성돼 있어, 48발보다 많은 미사일을 동시다발로 쏠 경우에 방어가 안 된다는 거다. 현재 북한은 약 1000발의 스커드·노동 미사일을 남한을 향해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드의 요격 성공률이 100%라고 해도 중과부적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아무런 여론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드 배치를 결정했다. 일본이 2012년부터 관련 협의를 시작한 뒤 이듬해 2~3월 환경조사에 이어 7개월간 15차례 주민설명회를 열고 설득한 것과 딴판이다. 게다가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을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등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런 행태는 펑유란의 경구에 담긴 교훈과 배치된다.
"작은 뜻을 베풀더라도 여섯 필의 말을 부리듯 하라"는 글귀를 다시 한 번 보자. 여섯 필이나 되는 말을 함부로 다루면 서로 부딪히거나 엉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조심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 아니함만 못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사소한 사안이라도 일하는 사람의 처지나 상태, 주변 환경, 성사 가능성, 손익 등을 잘 헤아려야 한다는 거다. 작은 일이 이런데 사드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영향이 큰 거대 사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생활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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